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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5-9화) 68운동-짧은 만남, 긴 여운
  • 운영자
    조회 수: 204, 2015.08.13 09: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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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3월22일 프랑스 파리에서 서쪽으로 16km쯤 떨어진 소르본느(Sorbonne)대 낭테르(Nanterre)분교에서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항의하기 위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뱅크(American Express Bank)’를 습격하려던 학생 6명이 경찰에 체포되자, 학생운동 지도자인 다니엘 콘 벤디트(D. Cohn-Bendit)를 비롯한 8명의 학생들이 항의의 표시로 ‘교수제도 및 사회에 대한 전체적인 이의제기’를 내걸고 낭테르대학 학장집무실을 점거한 것이다. 콘 벤디트 그룹에 비판적이거나 조소를 보내던 학생들도 체포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에 가담하면서 사건은 점점 확산되기 시작했다.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을 강타한 ‘68운동(May 1968 events in France)’은 이렇게 시작해 한국 지식인 사회뿐만 아니라 독일에 거주하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소르본느대학 측은 5월2일 낭테르 분교를 폐쇄했고, 자연히 5월3일 이후 투쟁은 파리 소르본느 본교로 옮겨붙었다. 학생들은 낭테르대학 폐쇄에 항의하면서 거리로, 광장으로 뛰쳐나갔다. 5월6일 중등교육교원전국조합(SNES)이 대학생들과 연대투쟁을 선언했다. 학생 시위대는 5월10일 파리 시내에서 바리케이드를 두고 경찰과 유혈충돌을 벌이는 등 ‘바리케이드의 밤’을 연출했다. 5월13일에는 노동총동맹(CGT)이 총파업 투쟁을 벌이며 가세, 1000만 명의 노동자가 시위에 참여했다. 바야흐로 시민의 힘, 광장의 힘이 분출(噴出)했다.

     

    하지만 5월27일 임금 10% 인상 등의 내용을 담은 ‘그르넬 협약(Grenelle agreements)’이 노동계와 정부 사이에 맺어지게 되면서 시위는 꺾이기 시작했다. 6월5일 시위를 끝으로 사실상 프랑스에서 68운동은 막을 내렸다. 학생들의 시위에 강경 대응했던 우파(右派) 정치인 드골(De Gaulle)은 6월 총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드골은 이듬해인 1969년 국민투표에서 패해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68운동은 프랑스는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 등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反響)을 일으켰다. 자본주의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뤄졌고, 특히 혁명의 가능성까지 타진됐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도 68운동은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68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67년부터 68운동의 기운(氣運)이 엿보였다. 1967년 6월2일. 독일 대학생들은 이란의 팔레비(Pahlavi) 국왕의 서베를린 방문에 맞춰 항의데모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대학생 베노 오네조르크(Benno Ohnesorg)가 베를린오페라하우스 앞에서 사복경찰의 총에 뒷머리를 맞아 숨졌다. 학생들은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고, 지루한 공방 끝에 9월 베를린 경찰총장과 내무장관, 시장이 퇴진했다. 학생들이 승리한 것이다.

     

    1968년 4월엔 베를린 거리에서 신파시스트에 의해 학생운동 지도자 루디 두취케(Rudi Dutschke)가 암살미수(暗殺未遂)된 사건이 발생했다. 격렬한 가두투쟁이 벌어졌다. 학생들은 며칠간 시가전을 전개했다. 특히 1968년 부활절 시위는 절정을 이뤘다.

     

    학생들은 대학개혁과 반미, 월남에서의 미군철수, 보수언론 반대, 자본주의 극복 등 정치사회적 요구뿐만 아니라 교육과 성, 기성세대가 간직해 온 가치관과 규범에 대한 거부와 대안을 요구했다. 독일 학생들이 내세웠던 슬로건 가운데 일부다.

     

    ―나이 30을 넘은 자를 신뢰하지 말라

    ―금지하는 것은 금지된다

    ―너를 파괴하는 자를 분쇄하라

    ―모택동 만세!

     

    하지만 학생들의 투쟁은 공장 노동자와의 연대 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정부 또한 대학 구조개혁 등에 신속하게 나서면서 급속히 진정됐다. 학생운동은 많은 소그룹으로 분화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많은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기존 사회민주당 노선에 흡수돼 갔다. 다른 이들은 탈(脫)권위를 기치로 한 아동교육 운동에 뛰어들었고, 또다른 이들은 노동현장으로 또는 적군파(Rote Armee Fraktion)를 조직해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했다.

     

    비록 68운동은 현실에선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독일 국민의 정치 의식화를 촉진해 1969년 9월 연방 총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42.7%의 득표율로 기민련을 제치고 제1당으로 등극하는 원동력이 됐다. 아울러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정부의 동방정책의 든든한 동력(動力)이 되기도 했다는 분석이다.

     

    68운동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에게 어떤 영향(影響)을 미쳤을까. 주로 세계관과 사회관의 확장(擴張)과 함께 결과적으로 인생관의 전환(轉換)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상당수 파독 광부나 간호사도 이 같은 맥락에서 증언한다.

     

    “독일 친구들을 통해 독일 사회의 변화도 조금씩 느끼게 됐다. 독일에서는 소위 ‘68세대’에 의한 사회운동으로, 사회 전반이 개혁의 와중에 있었다. 특히 여성과 교육부분에 많은 개혁이 있었다. 어린이들이 사회 규범에 끼워 맞추던 권위적 교육에 반대한 자유로운 교육, 예를 들면 ‘썸머힐(Summer hill)’이나 ‘반권위주의 교육운동’ 등이 그것이다. 너무나 경이로운 테마들이었다.”(최영숙, 2002.1.28, 10면)

     

    특히 일부 파독 광부와 간호사는 교제하던 독일 여성 또는 남성을 통해 68운동의 문제의식을 깊숙이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럽 사회를 강타한 68운동은 독일에 정착한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실제 삶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한 파독 간호사는 68운동의 아동교육운동 그룹이 세운 학교에 교사로 채용되기도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시립보육원에서 2년6개월간 근무한 후, 사립보육원 교사로 채용됐다. 이 보육원은 1968년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자녀를 비권위주의적이며 자유로운 환경에서 교육시키고자 시의 재정지원을 받아 독립적으로 설립, 운영하는 곳이었다…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학부모들이 나를 채용한 이유는 이러했다. 첫째, 그들이 나를 채용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손해를 볼 것이란 기분이 들 정도로 나의 행동이 꾸밈없고 당당(堂堂)했으며, 둘째,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다른 문화를 의식적으로 교육시킬 필요가 없고 자연히 외국인에 대한 선입견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송금희, 2002.6.3,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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