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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6-2화) 남은 자-한국 가발 신화를 쏘다2
  • 운영자
    조회 수: 354, 2015.08.14 08: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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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9월 어느 날 오후 독일 함부르크에서 뒤셀도르프로 이어진 아우토반. 한국인 3명을 태운 자동차가 쏜살 같이 남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파독광부 1차2진 출신 이구희와 최병진, 그리고 1차5진 출신 구성원이었다. 독일 최대의 공업지대인 루르(Ruhr)지역에서 가발을 팔기 위해 내려가는 길이었다.

     

    이구희는 독일에 남기로 하고 그해 4월부터 함부르크에서 가발을 팔아왔다. 이구희를 태우고 다니던 구성원은 나중에 브라질에 정착했다. 반면 미국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1년 넘게 배를 탔던 최병진은 미국 시카고로 떠나기 직전 이구희의 제안으로 잠깐 함께한 경우였다. 이구희가 “고생하지 말고 차 한 대 가져와 가발을 팔라”고 제안해 중고차 ‘오페라’를 한 대를 산 뒤다. 이구희는 이후 30마르크 안팎에 공급받은 가발을 최병진의 오페라에 실어주고 60-70마르크를 받고 팔라고 했다. 가발은 잘 팔렸지만, 최병진은 가발을 오래 팔지는 못했다. 이구희는 최병진이 가발을 팔아 번 돈을 카지노에서 날려버린 것을 알고 더 이상 가발을 공급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구희와 구성원은 최병진이 미국 시카고로 떠난 뒤에도 루르지역을 돌며 가발을 팔았다. 차를 타고 가다가 소변이 마려우면 콜라병에 오줌을 누면서 미장원을 돌고 또 돌았다.

     

    이구희가 처음 독일에서 팔던 가발은 홍콩 가발이었다. 그는 함부르크의 신일 박사가 운영하는 ‘삼호무역’에서 홍콩 가발 판매의 10%를 수익으로 받기로 하고 대신 팔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구희와 신 박사간 입장차가 생겼다. 직접 현장에서 가발을 팔던 이구희는 소매(小賣)의 한계를 느껴 도매(都賣)로도 팔자고 주장한 반면 신 박사는 사업 확장이 번잡할 뿐만 아니라 위험도 커진다고 반대했다. 두 사람은 1970년 7월 결별(訣別)했다. 이면에는 홍콩 가발보다 한국 가발을 팔고 싶었던 소박한 애국심도 작용했다고, 이구희는 털어놨다.

     

    이구희는 신일 박사와 결별한 후 한국으로 들어왔다. 자신에게 가발을 공급해줄 회사를 찾기 위해서였다. 1970년대 초반 가발산업은 한국 수출품목 1호였다. 수출실적 10위 기업 안에 3-4곳이 가발공장이 차지할 정도였다. 대표적인 가발 업체로 서울통상과 다나무역, 한독 등이 꼽혔다.

     

    이구희는 서독 판매책임자로 인정해주면 책임을 지고 가발을 팔아주겠다고 한국 가발회사에 제의했다. 가발 회사들은 냉담했다. 인조 가발을 주로 생산·판매하는 동화통상만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그는 동화통상과 손을 잡기로 했다. 그 때가 1970년 10월. 한국에 들어간 지 3개월만이었다.

     

    서독으로 돌아온 이구희는 판매대행사의 형식에 대해 고민했다. ‘동화통상 서독지사를 만드는 게 좋을까, 아니면 개인회사를 차리는 게 좋을까’. 그는 다소 돈이 들더라도 지분이 확실히 보장된다는 점에서 개인회사가 낫겠다고 판단했다. 도이체방크 모 지점장의 도움으로 이구희의 지분 90%, 아내 지분 5%, 지점장의 아내 5%로 구성된 개인회사를 뒤셀도르프 엘라스트라세에 세웠다. 이름은 ‘KCD&COCA’. 1971년초의 일이다.

     

    이구희는 동화통상에서 개당 1000원을 주고 가발을 수입했다. 세금과 운임 등 부대비용을 포함, 독일에 오면 10마르크 내외가 됐다. 그는 여기에 20배의 이윤을 붙여 200마르크씩 받고 서독 소매상에 팔았다. 이 정도 가격은 당시 서독 가발업계에 비해 싼 편인데가 품질도 우수했기에 한국 가발의 인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전에 ‘삼호무역’에서 함부르크 미장원을 평정했던, 그만의 가발 판매 노하우였던 반품 수리 마케팅까지 더해지면서 독일에서 많은 가발을 팔게 됐다. 한 달에 800-1200개 정도를 팔았다.

     

    주문이 쏟아지자, 이구희는 뒤셀도르프 중앙역 앞 칼스트라세에서 300쿼드라(quadra)짜리 대형 가게를 차렸다. 가게 양쪽에 한국 가발을 길게 전시했다.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도·소매에서 호조를 보여 하루에 가발 2만장, 20-30만마르크를 벌기도 했다.

     

    한국 가발을 독일에서 팔기 시작한 이구희의 선전으로 한국 가발은 3개월만에 홍콩 가발을 제치고 서독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미장원이나 백화점마다 한국 가발을 찾는 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공항에는 한국 가발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때 서독에서 남성용 특수가발 판매량의 90%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 한국 가발은 한 번도 독일에서 1위 자리를 뺏기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 가발의 신화였고, 그 중심엔 이구희가 있었다.

     

    한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도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발원사 베니스 지점을 개설,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와 김 전 회장은 대구초등학교 동기 동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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