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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6-3화) 남은 자-한국 가발의 신화를 쏘다3
  • 운영자
    조회 수: 257, 2015.08.14 08: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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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에서 ‘한국 가발의 신화’를 쏘아올린 이구희는 1934년 일본 오사카에서 한의사인 아버지(1901-1964)와 가정주부인 어머니(1899-1950) 사이에 3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부모가 일본에 정착한 것은 1928년쯤. 한의사인 아버지는, 당시 ‘1구 2침 3약론’(가장 빠른 것은 뜸이요, 두 번째는 침, 세 번째가 약이라는 한의학이론)이 보편적인 인식이었지만, 뜸과 침은 하지 않고 한약만 취급했다. 낙향한 고종 황제의 어의(御醫)인 죽천(竹川) 변석홍(邊錫弘·1846-1926년) 의원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아버지는 뛰어난 의술을 가졌지만, 장사를 하려 하지 않았다. 특히 돈 관리를 못했다. 환자가 돈을 가져오면 받고, 그렇지 않으면 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어머니와 자주 다투었다. 다만 2차 세계대전 중에도 농사짓는 사람들이 콩과 밭 등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가져다 줘 배는 곯지 않았다.

     

    이구희가 가족과 함께 귀국한 때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아버지 고향인 경북 고령과 가까운 대구에 정착했고, 1948년 덕산초등학교(현재 대구초)에 입학했다. 한글도 몰랐던 그는 3개월 동안 시험을 준비, 1949년 대구중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은 반면 어머니는 강하게 공부를 채근했다. 어머니는 1950년 6·25전쟁 중에 숨졌다.

     

    이구희는 1952년 경북고에 입학했다. 고교 3학년 때에는 첫 수업과 마지막 수업을 자주 빠졌고 결석도 자주 했다. 친구와 함께 ‘공납금’을 이미 써버렸는데, 담임선생으로부터 이 시간에 공납금을 빨리 내라고 독촉받는 게 듣기 싫어 도망갔던 것이다. 친한 동기로는 『한국일보』 경제부장 출신으로 『한일경제신문』을 창간했던 신동욱씨와 김영삼 대통령 시절 검찰총장을 역임한 박종철씨가 있다.

     

    1955년 경북대 철학(哲學)과에 입학한 이구희는 이듬해 철학을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 일본행을 시도했다. 하지만 일본에는 가지 못했고, 이 일 때문에 군에 입대했다.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등록금으로 뱃삯을 치르고 배를 탔다. 그런데 다음 날 눈을 떠보니, 배는 그대로 부산 영도 앞바다에 떠있는 게 아닌가. 물결이 너무 거칠어 1주일 후에 출항한다는 것이었다. 돈을 돌려받았다. 무단결석을 해 집에도 갈 수 없어 군에 입대했다.”

     

    이구희는 3년 8개월간 강원도에서 복무했다. 주특기는 공병. 그는 군에서 많은 ‘추억’을 만든 뒤 1960년 일등병으로 제대했다. 무단 탈영이 잦았던 시절이라, 군 복무중 짧지만 사진기자 생활도 했다.

     

    1958년 어느 날. 모 지방신문에 다니는 속기사 친구가 이구희를 찾아왔다. 이구희는 그때 군에서 무단 탈영(脫營)한 상태였다. 친구는 자기의 신문사에 사진기자가 없다며 카메라가 있는 그에게 사진 기자직 응시를 제의했다. ‘군인’ 이구희는 신문사 사장을 만났다. 곧바로 취업이 됐다. 사진을 찍었다. 신문사 기자라고 하며 술까지 얻어먹었다. 12월10일 ‘인권의 날’에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등의 플래카드가 걸린 형무소 정문 사진을 찍어 신문에 싣기도 했다. 대구 동천에서 열린 주한 미공군의 에어쇼를 보도한 뒤 그만뒀다.

     

    “사장과 사진부장, 나 이렇게 셋이서 지프차를 타고 행사장에 들어갔다. 신났다. 에어쇼 장면을 여러 장 찍었다. 조종사 꽃다발 증정식도 있었다. 나는 포토라인 안까지 들어가 저돌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포토라인을 넘지 못한 사진기자들이 화를 내고 쑥덕거렸다. ‘저기 누구고’ ‘저 모르는 놈이…’. 사진을 다 찍고 나오니까 이 장면을 본 사장이 어깨를 툭 치며 ‘잘했어’라고 격려한 뒤 점심까지 사줬다.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암실에 들어가서 필름을 인화해보니 에어쇼 장면에 비행기가 없는 게 아닌가! 하얀 연기만 보일 뿐이었다. 사장도 얼굴이 창백해졌다. 결국 『영남일보』에 가 사진을 얻어야 했다. ‘당신 말야, 코앞에서 난리 브루스치던 놈 아이가?’ 『영남일보』 사진기자는 눈을 치켜세우며 화를 냈다. 머리 숙여 몇 차례나 사과한 뒤 ‘좋은 것 말고, 두 번째로 좋은 것으로 달라’고 사정했다. 이 일이 있은 뒤 기자직을 그만뒀다.”

     

    이구희는 군 제대 후 해운공사에서 치른 ‘마도로스(matroos․외항선 선원)’ 선발 시험에 응시했다. 합격한 뒤 아버지에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게 됐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처음엔 승낙하다가 나중엔 반대했다.

     

    “구희야, 이리 와봐라. 배타고 나가면 얼마나 있게 되느냐?”

    “일본은 1, 2주 정도 걸리고, 멀리 가면 3, 4개월 정도 걸리기도 한답니다.”

    “그렇게 오래 걸리느냐. 다시 생각해봐라. 내가 돈 벌어줄테니 가지 마라.”

     

    이구희는 아버지의 설득에 선원이 되는 꿈을 접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1962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34대1의 경쟁률이었다. 발령이 늦어졌다. 그 사이 대구의 강창과 멍덕리, 안강 등지에서 낚시를 하며 소일했다.

     

    이구희는 공무원시험에 합격했지만 단 하루도 정식 근무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인플루엔자 후유증으로 숨진 1964년 경북 상주군청에 근무하라는 발령을 받았다. 3월 어느 토요일 오후. 여관을 잡아놓은 뒤 상주군청에 신고하러 갔다. 군수는 공무원 연수를 받을 때의 교장이었다. “고맙다”며 반갑게 그를 맞았다. 하지만 인사계장과 틀어졌다. 그는 말싸움 끝에 주먹을 휘둘렀다. 사람들이 몰려왔고, 이구희는 그대로 도망쳤다.

     

    일요일 아침. 이구희는 다음날 출근을 생각하니 전날 싸운 것 때문에 갑갑했다. 결국 상주군청 근무를 포기하고 아침을 먹고 대구행 버스를 탔다. 버스 속에서 우연히 신문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파독광부 모집’. 그에게 한 줄기 새 희망이 솟아나는 느낌이었다.

    이구희는 경상북도 노동위원장의 도움으로 문경탄광에서 ‘광부 경력’을 만든 뒤 파독광부 시험에 합격, 1964년 10월6일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독일에서 ‘한국 가발의 신화’를 만든 뒤 석재(石材)산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 2015년 현재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가발가게를 운영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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