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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6-4화) 떠나는 자-바다를 가르거나 하늘을 나르라1
  • 운영자
    조회 수: 757, 2015.08.15 10:06:13
  • 200408arUntitled-9.jpg

     

    안개 걷히고,

    하늘 맑아지며

    오일루스는

    불안한 굴레를 풀어주네.

    바람은 살랑거리고

    선장은 움직인다!

    속력! 속력!

    파도가 갈라지며

    먼 곳이 가까워지니

    벌써 그 땅이 보이네!

    -괴테, 「행복한 항진」에서

     

    1966년 9월 어느 날. 서독 항구도시 함부르크에 위치한 유명한 선박회사 ‘하팍로이드(Hapag-Lloyd)’ 사무실에 20대 한국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배를 태워달라고 사정했다. 미국을 가기 위해 카스트롭라욱셀 광산을 무단 이탈(無斷離脫)한 1차2진 파독 광부 최병진(1938년생)이었다. 통역에게는 파리에 간다며 여권을 받아낸 뒤 함부르크 총영사관에서 그럴 듯한 이유로 하소연해 아이슬란드와 중남미 등으로 경유지 변경을 받아낸 뒤다.

     

    하팍로이드 측은 최병진에게 그냥 기다리라고 했다. 그는 기다리는 동안 돈이 넉넉하지 못해 싸구려 여관을 전전했다. 겔젠키르헨 광산에서 온 1차2진 동료 최명학을 만나 잠시 배고픔을 달래기도 했다. 최명학도 미국으로 가기 위한 ‘무단 이탈자’였다. 선원이 되려던 파독 광부의 고단한 모습이다.

     

    “낯설고 외진 북부 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 아는 동료도 없었을 뿐 아니라 가뜩이나 분위기가 살벌한 항구도시다. 그는 긴장을 풀지 못한 채 답답한 가슴이 됐다. 항구 부근의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고 차안에서 새우잠으로 밤을 보낸 후 부둣가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선박회사의 게시판에 적힌 외항선원 모집광고를 수첩에 적어뒀다가 외항선이 도착하면 달려가서 서류접수를 시도하곤 했다. 하지만 체류허가 연장허가서의 동봉을 이유로 어느 한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하루 종일 외항선원 인력관리소를 돌아다니다가 빈 주차장으로 돌아오면 배도 고프고 심신도 피곤해 춥고 어두운 기나긴 밤 동안 한 번도 깨지 않고 새벽까지 잠들곤 했다. 출항했던 선박이 다시 돌아와 선원을 모집하면 달려가기를 계속하던 어느 날. 인사 담당자가 몇 번이고 외항선을 타기 위해 달려오는 홍수 형님의 노력에 감동해 서류심사를 면제하고 외항선을 타게 배려해줬다.”(장재인, 2002, 194-195쪽)

     

    얼마 후 하팍로이드사의 1만 2000t짜리 대형 화물선이 들어왔다. 최병진은 화물선으로 달려가 배를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하팍로이드사는 독일어를 하면 배에 태워주겠다고 했다. 그는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다며 태워달라고 거듭 사정했다. 하팍로이드사는 그에게 선원수첩을 만들어줬다. 체류허가도 연장시켜주겠다고 했다. 마침내 선원(船員)이 된 것이다. 광산을 떠난 지 2개월만이다.

     

    미국 이민이 꿈이었던 파독 광부 최병진에게 ‘선원’이 된다는 것은 애초 한국에서는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가 파독 광부를 지원한 것도 모두 미국 이민을 위해서였다. 그런 그가 미국에 가기 위해 계약기간 3년을 다 채우지도 않고 광산을 무단이탈한 뒤 함부르크로 와 선원이 된 것이다.

     

    최병진의 경우처럼, 1966년부터 미국을 비롯한 제3국 이민을 위해 계약기간 만료 이전에 광산을 떠나는 파독 광부들이 늘고 있었다. 1965년 2개 광산에서 14명에 그쳤지만 1966년 3월까지 4개 광산 47명으로 증가세를 보였다(정해본, 1988, 102-104쪽 참조).

     

    계약기간 내의 파독 광부 이탈이 급증한 이유는 제3국 이민을 희망하는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체류허가 기간(3년)안에 이민하려 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체류 허가가 끝나기 이전에 이민을 시도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고 여유가 있어서다. 그들은 힘든 지하 채탄작업을 빨리 그만두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제3국행을 겨냥하고 계약 만료 전에 독일 광산을 떠나는 이들은 더욱 늘어 1967년 10월말에는 265명으로 급증세를 보였다(『동아일보』, 1967.11.16, 1면 참조). 이들은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프랑스, 노르웨이 등 남미나 유럽의 제3국으로 향했고, 심지어 6명은 소재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다. 서독연방공화국 광산협회는 이에 사실상 ‘제1차 파독광부 협정’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다(『동아일보』, 1967.11.16., 1면 참조).

     

    파독 광부들이 3년 고용기간을 모두 끝마친 뒤에도 가장 많은 선택하는 진로도 제3국행이었다. 백상우의 지적은 당시 제3국행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 잘 설명해준다.

     

    “극소수가 귀국하고(내 지역에서는 125명이 파독해 3년 후 공식 귀국자가 16명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머지는 미국이나 캐나다에 취업이나 이민을 간다. 또는 스페인 프랑스 브라질 칠레 스웨덴 같은 나라에 살 곳을 찾아가게 된다.”(백상우, 1997b, 218쪽)

     

    본의 주독 한국대사관, 뒤셀도르프 주독 한국총영사관 등은 제3국 이민을 위해 몰려오는 한국인 광산 노동자들로 곤욕을 치렀다. 쏟아지는 비자(Visa) 업무 때문이다. 1차1진 파독 광부 조립의 얘기다.

     

    “뒤셀도르프 주독 한국총영사관에선 파독 광부의 미국 비자 신청이 폭주하는 바람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나는 광부를 대신해 비자를 받아주곤 했다. 어느 날, 총영사관 측에서 ‘당신은 가지 않고 왜 자꾸 사람들을 데려와 비자달라고 그러느냐, 당신부터 가라’고 하소연을 할 정도였다. 미국행 비자발급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파독 광부들은 왜 하필 선원이 되려 했을까. 미국에 가기 위해선 미국 비자가 필요했지만, 파독 광부들이 미국 비자를 받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비자를 쉽게 내주는 곳으로 가야 했다. 당시 미국 비자를 쉽게 내준다고 알려진 곳은 아이슬란드나 중남미 국가. 그들은 그곳에 가서 경유지 변경(經由地變更)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미국 비자를 받았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선원이 돼야 했던 것이다.

     

    최병진이 탔던 화물선은 1만 2000t급 대형 화물선이었다. 배 앞에는 선장과 항해사가 탔고, 뒤에는 마도로스, 기관사 등이 탔다. 총인원은 48명 수준. 배는 함부르크에서 엘베(Elbe)강을 타고 상류인 벨기에의 안트베르펜(Antwerpen)으로 갔다. 달리는 속도는 대략 6노트(Knot). 얼마 뒤 대서양으로 나아갔다.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찌는 듯한 더위. 말 그대로 철판 위에서 달걀이 익을 정도였다.

    중남미 첫 경유지인 니카라과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40여일. 니카라과,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파나마 운하를 경유해 다시 돌아오는 데 3개월 반이 걸렸다. 짐을 현지에 내려주고 대신 커피 원두를 실었다.

     

    최병진은 배 안에서 밥을 나르는 일을 했다. 시간이 나는 대로 독일어를 공부했다. 독일어 학습서인 『독일어 삼위일체』를 3개월 만에 다 외울 정도였다. 마침 교사를 하던 사람도 타고 있어 그에게서 독일어를 배우기도 했다.

     

    배 위에서 ‘막스’로 불린 최병진은 항해 40여일 만에 ‘주먹왕’으로 등극했다. 강하지 못하면 천덕꾸러기가 되겠다는 위기의식이 그를 ‘주먹왕’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매일 손에 수건을 두르고 화물선 한 켠에 만든 나무기둥을 100대씩 때렸다. 파워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억센 뱃사람들의 세계였기에 힘이 필요했다.

     

    한 독일인 선원이 나무기둥을 때리고 있는 막스 최병진의 모습을 보고 “무엇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서투른 독일어로 “코리안 가라테를 연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인 선원은 그처럼 나무를 한번 쳐봤다. 하지만 독일인은 전혀 준비 없이 쳤기에 아파서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특히 독일 선원들과 한 차례 다툼 후엔 아무도 ‘막스’를 무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막스’ 최병진은 배가 멈추면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가곤 했다.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서다. 하지만 쉽게 경유지 변경을 해주지 않았다. 1년 반을 훌쩍 넘긴 1968년 어느 날. 그는 에콰도르의 미국대사관에서 미국 시카고를 경유하는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기간은 단 3일이었다. 곧바로 함부르크로 돌아왔다.

     

    잠깐 이구희와 가발장사를 했던 최병진이 미국 시카고행 비행기를 탄 것은 1968년 11월. 미국에 가고자 광산에서 뛰쳐나온 지 2년이 지난 때다. 아울러 미국행을 꿈꾸고 한국을 떠난 지는 4년이 흐른 뒤다. 그가 미국 시카고(Chicago)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는 이미 파독 광부 50-70명이 먼저 와 있었다. 대다수가 그처럼 배를 타고 경유지를 변경, 이곳에 왔을 것으로 추정됐다.

     

    최병진은 ‘거리 수용소’의 소개를 받아 여행자들이 주로 묵는 1달러짜리 방을 구했다. 침대 하나가 딸린 조그만 방이었다. 샌드위치는 60센트, 커피는 공짜. 돈이 넉넉지 않았기에 커피를 잔뜩 먹는 방식으로 배를 채웠다.

     

    오전 5시. 최병진은 신문 한부와 지도를 산 뒤 무작정 직장을 구하러 나섰다. 회사처럼 보이는 곳에는 닥치는 대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를 고용하겠다는 곳은 없었다. 오후 10시까지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계속 길을 걸었다. 걷다보니 시카고 시내를 벗어나 버렸다.

    그런데 멀리서 불빛이 뿜어져 나오는 게 보였다. 공장의 불빛 같았다. 최병진은 불빛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다리는 이미 풀릴 대로 풀려 있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직장을 구해야 했다. 얼마를 갔을까. 자동차 한 대가 그의 앞에서 멈췄다. 미국인이 타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태워주고 싶은데요.”

    “예, 저기 공장처럼 보이는 곳에 가려고 합니다.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길인데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니, 도대체 여기에서 저기까지 얼마나 먼 줄 아십니까. 어서 차에 타십시오.”

     

    미국인은 바로 그 회사의 직원이었다. 미국인은 최병진을 공장까지 태워줬다. 회사는 전국적으로 화물을 운송하는 곳이었다. 그가 회사에 들어가자 회사에서는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 회사 측은 “송장(送狀)을 볼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군 병참기지에서 일했기에 “송장을 볼 줄 안다”고 대답했다. 회사 측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이것으로 그의 채용이 결정됐다. 그때가 밤 12시.

     

    최병진은 화물 번호에 따라 화물을 차에 싣는 일을 했다. 그는 직업을 가짐으로써 미국 정착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오전에는 주물공장, 오후에는 식당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많은 돈을 모았다. 숙소도 7달러짜리로 옮겼다. 파독광부 출신 ‘막스’ 최병진은 독일에서 배운 근면정신과 절약정신을 바탕으로 미국 시카고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1년 뒤인 1970년 12월 독일로 돌아왔다. 현재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뮌첸글라드바하(Monchengladbach)에서 김밥 집을 운영 중이다. 귀국 직후 만난 아내(1950년생)와 1남2녀의 자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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