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메뉴 건너뛰기

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6-5화) 떠나는 자-바다를 가르고 하늘을 나르라2
  • 운영자
    조회 수: 252, 2015.08.15 10:06:31
  • 미국 캐나다-구글지도.jpg

     

    1968년 7월 말. 한국인 두 사람이 캐나다 토론토(Toronto)의 이민자를 위한 기관인 ‘맨파워(Manpower)’ 사무실에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섰다. 캐나다에서 직업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 가운데 파독 광부 출신 김영호(1940년생)도 포함돼 있었다.

     

    파독 광부들이 3년의 계약근무를 마친 후 선택한 제3국 행선지는 캐나다와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 스위스, 스웨덴 등 다양했다. 여러 나라 가운데 미국과 캐나다가 다소 많았다는 게 파독 광부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캐나다는 이민 절차가 까다로웠던 미국과 달리 비교적 쉬웠다. 가족과 친지, 후원자 등의 초청 이민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파독 광부들이 자연스럽게 캐나다로 향했던 것이다.

     

    맨파워 측은 김영호가 한국과 독일에서 전기 관련 일을 해왔다는 것을 알고 전기면허 시험을 보라고 권했다. 그는 10월 주정부 전기면허를 땄다. 3년 후엔 캐나다 전체 전기면허를 따내 ‘한국인 첫 캐나다 전기면허 소지자’가 됐다. 그는 케이블TV를 가설하는 회사에서 7년간 일한 뒤 1975년 전기회사를 세웠다. 이후 사업이 번창하면서 ‘캐나다 드림’을 이뤘다고 한다(송광호, 1991, 286-292쪽 참조).

     

    1940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난 김영호는 파독광부 1차5진 출신. 1962년부터 경북 문경시멘트에서 전기사원으로 근무한 그는 1965년 6월25일 전기공(電氣工)으로 파독했다. 다른 전기공 3명과 함께 광산에 배치됐다.

     

    김영호가 처음부터 독일 현지에서 전기공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독일 광산회사 측은 채탄부와 전기공 두 부문의 보조를 시켰다. 전기공으로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싸운 1년 후에야 전기공으로 인정받았다. 한 달간의 전기기술 테스트와 함께 한국에서 관련 증명서를 제출한 뒤다. 그는 전기공으로서 오전반에 배치됐고, 이후 안정된 생활을 했다.

     

    김영호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된 것은 이미 캐나다로 이민을 간 친구의 권유 때문이었다. 친구는 캐나다로 이민을 희망한다면, 후원자가 돼주겠다고 했다. 고민 끝에 그는 쾰른에 있는 주독 캐나다대사관으로 갔다. 친구를 후원자로 한 이민 신청서를 냈다(송광호, 1991, 286-292쪽 참조).

     

    파독 광부 1차3진 출신 엄모씨도 캐나다에 정착한 경우이다. 1939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엄씨는 1964년 11월부터 뒤스부르크 광산에서 채탄부로 2년 반 일한 뒤 계약 종료 전인 1967년 이민을 신청했다. 그는 1989년 이래 2006년 현재까지 캐나다에서 남북한을 오가며 무역사업을 하고 있다(송광호, 1991, 128-133쪽 참조).

     

    물론 파독 광부가 가장 많이 선택한 제3국은 미국이었다. 1972년 독일 겔젠키르헨에서 미국 뉴욕으로 이주해간 파독광부 모임에 20여명이나 나왔다는 얘기와 200여명이 독일출신 모임을 만들었다는 얘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장재인의 설명이다.

     

    “얼마 후 돌아온 창식 선배는 기셀라에게 예약해 놓은 호텔에 여장을 풀게 한 후 독일 겔센에서 뉴욕으로 이주한 한인 모임에 기셀라를 데리고 참석했다. 그곳에는 한인 20여명이 모였다. 그녀에게도 대부분 일면식이 있는 얼굴이었다. 창식의 소개로 인사를 한 이들은 식품점과 정비공장, 택시사업, 건축업, 음식점, 여행사 등을 하며 생활이 안정된 사람들이었다. 200명 정도의 독일 출신이 모임을 만들어 자주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는 한국인의 단결된 힘에 놀랐고 마치 겔센에 있는 모든 한국인이 뉴욕으로 옮겨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장재인, 2002, 107-108쪽)

     

    프랑스와 네덜란드, 스위스 등 유럽으로 이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현재 프랑스 동포 사회는 주로 이주한 파독 광부와 간호사, 유학을 와서 잔류한 사람들로 이뤄졌다. 네덜란드의 경우 1995년 현재 한인이 785명 수준으로 순수 교민(370명) 상사공관원(330명) 유학생 가족(90명) 등으로 구성됐다. 교민은 무역회사 지사 등에서 근무하던 사람이 주저앉거나 파독 광부가 이주한 경우가 많았다(이광규, 2000, 213-214쪽 참조).

     

    북유럽의 스웨덴에도 상당수의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정착했다. 스위스에도 많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정착했다. 1970년대 후반 스위스에 정착한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100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

     

    파독광부 출신이 캐나다와 미국 등 제3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독일의 지하 1000m에서 배운 ‘독일 정신(獨逸精神)’이 바탕이 됐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과 자세가 이미 갖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1차1진 조립의 설명이다.

     

    “미국이나 캐나다로 간 많은 파독 광부들은 대부분 성공했다. 지금 미국에서 잘 살고 있는 동포 가운데 상당수가 파독 광부 출신이다. 성공의 밑천은 독일에서 광부로 일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배에서 꼬르락 소리가 나도 체면 때문에 아무 일이나 하지 못한다. 하지만 독일에 살면서 그것이 아니라는 걸 체험으로 배웠다. 그것이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성공할 수 있는 제일 큰 자본이 됐을 것이다.”

     

댓글 0 ...

위지윅 사용
번호
제목
닉네임
58 운영자 394 2015.09.05
57 운영자 77 2015.08.30
56 운영자 994 2015.08.30
55 운영자 220 2015.08.30
54 운영자 722 2015.08.30
53 운영자 193 2015.08.30
52 운영자 146 2015.08.30
51 운영자 171 2015.08.30
50 운영자 263 2015.08.30
49 운영자 215 2015.08.30
48 운영자 592 2015.08.30
47 운영자 105 2015.08.29
46 운영자 126 2015.08.29
45 운영자 322 2015.08.29
44 운영자 198 2015.08.15
43 운영자 252 2015.08.15
운영자 252 2015.08.15
41 운영자 757 2015.08.15
40 운영자 257 2015.08.14
39 운영자 354 2015.08.14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