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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6-7화) ‘독일 정신’을 품고 귀국한 자들2
  • 운영자
    조회 수: 198, 2015.08.15 10:07:13
  • 독일마을-구글지도.jpg

    <경남 남해의 독일마을 구글지도>

     

    “1963년 12월21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독에 파견됐던 광부 236명 중 제1진 115명이 21일 오후 5시10분 에어프랑스 편으로 돌아왔다. 해외파견 근무 3년 동안 숱한 화제를 낳았던 ‘인력수출 1호’의 귀국 모습은 퍽 건강하고 밝아보였다.”(이용승, 1966.12.22, 4면)

     

    1963년 12월 독일로 떠났던 파독광부 1차1진 115명이 3년 후인 1966년 12월 한국으로 돌아오던 당시 모습을 전한 신문 기사이다. 조국으로 돌아온 파독 광부는 출발 당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규모였다.

     

    파독 광부들이 이처럼 소수(少數)만 귀국하는 것은 “직업상의 기술습득과 지식 향상을 위한다”(‘제1차 파독광부 협정’ 제1장)는 광부 파독의 당초 목표가 크게 훼손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광부 파독의 목적 달성을 단순히 귀국자 규모로 평가한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기술습득이란 기본적으로 사람과 시스템으로 축적된다는 점에서 이 같은 평가는 크게 틀리지 않다는 분석이다.

     

    파독 광부의 귀국은 단순히 광산 노동자들이 몸만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킨 독일인의 근면과 절약 정신을 배우고 돌아왔다. 이는 파독 광부의 증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서울 미아동 이종관씨는 ‘한국 광부들은 퍽 성실하고 근면하다는 평이지요. 우리들이 처음 가서 느낀 것은 요령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곳에서도 성실과 인내로써 일하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배운 점이죠’라고 말했다.”(이용승, 1966.12.22, 4면)

     

    일부는 계약 이후 독일에서 공부, 박사학위를 받고 국내 강단으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독일 본대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동국대 교수를 역임한 조희영 박사를 비롯, 권이종 한국교원대학 교수, 석종현 단국대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파독 간호사들이 3년간의 근무를 마친 뒤 선택하는 진로도 광부들과 엇비슷했다. 일부는 미국과 캐나다 등으로 이민을 갔다. 일부는 독일에 남았고, 또 다른 일부는 귀국했다. 특히 독일에 남은 간호사들은 대부분 소속 병원과 재계약했고, 일부는 다른 직업으로 전업하기도 했다.

     

    “3년 근무를 마친 간호사 중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한 병원에 같이 근무하던 동문 선배가 함께 캐나다로 가자고 했을 때, 나는 망설였다. 유난히 어렵게 시작했던 독일생활이었다. 다시 다른 나라에 가 말을 배우고 (그곳) 사람들과 기후, 생활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계속 독일에 머물기로 결정을 했다.”(김순임, 2003.4.21, 12면)

     

    파독 광부와 마찬가지로 계약기간 전에 미국으로 가는 간호사도 적지 않았다. 계약기간 전에 미국과 캐나다 등으로 가버린 간호사 수가 120명을 넘어 ‘사회문제’가 돼 언론에서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이수길, 1997, 177쪽 참조).

     

    파독 간호사의 이탈(離脫)이 급증한 배경에는 간호사 자신의 판단도 크게 작용했지만 미국의 외국인 간호사 정책변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즉, 파독 간호사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가 잇따르면서 미국도 이전과 달리 한국 간호사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1966년부터 한국 간호사들이 서독에 취업하고 실력을 인정받아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이 매스컴을 통해 미국에 알려지자 뉴욕을 비롯한 일부 주에서 지금까지의 한국 간호사 기피(忌避) 정책을 바꿔 독일에서 근무하고 있는 간호사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러한 미국 사정을 탐지한 한국의 기술직업소개소 책임자들이 1966년 말부터 프랑크푸르트에 주재하면서 연줄을 통해 미국 취업을 권고하고 동시에 미국 병원 취업을 주선하기 시작했다. 일부 한국 간호사들은 그렇지 않아도 기회만 있으면 미국에 가 일하고 싶던 차라 이런 때를 놓치지 않고 동료들도 모르게 직업소개업자와 약소 장소에서 만나 상담을 성사시켰다.”(이수길, 1997, 175쪽)

     

    물론 파독 간호사의 미국 생활이 100%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독일과 달리 미국의 사회복지 체계가 상대적으로 미흡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수길의 지적이다.

     

    “미국에 간 간호사의 통계는 알 수가 없지만 대부분이 차별대우를 심하게 하는 미국 병원생활을 청산하고 배우자와 같이 자유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보장이 완전히 확보되고 노동법규가 엄한 독일과 달리 미국에서는 외국 간호사가 미국 간호사보다 훨씬 적은 월급을 받고 일했다. 휴가도 독일의 6주와 비교가 되지 않는 2주 정도이다. 병이 났을 경우에는 모든 것을 자비 부담해야 한다. 1960년대에는 달러 환율과 마르크의 차가 많아 미국에서 받은 월급이 서독보다 많았지만 사회보장 혜택을 빼면 비슷했다.”(이수길, 1997, 177쪽)

     

    1967년. 서독 석탄사업의 쇠퇴와 전반적인 경기 침체의 영향, 동백림 사건의 여파, 한국 광부와 한국 정부에 대한 불신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광부 파독과 간호사 파독은 모두 중단됐다. 독일의 경기불황과 광산산업 자체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게 근본적인 원인이었지만, 동백림사건으로 인한 들끓는 여론도 한국인 광부파독 중단에 무시하지 못할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정해본의 지적이다.

     

    “광부 파독의 물결이 끊어진 이유로 독일에서는 광산 사양화와 불경기, 마르크화의 절상, 국내 정치 문제 등을 들고 있었지만, 여기에는 1967년 동베를린 사건의 광부연계설도 크게 작용했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 정부와 한국 광부에 대한 불신이 광부고용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정해본, 1988, 155쪽)

     

    특히 1968년부터 중지된 간호사 파독의 경우 한국과 독일 양국 사회에서 여론이 좋지 않게 돌아간 것도 배경으로 작용했다. 즉, 일부 종교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인도적 차원에서 간호사 파독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적지 않았다.

     

    “한국과 독일 여론이 한국 간호사, 보조원의 서독 취업을 인도적인 견지에서 제지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종교계통인 후진국 원조단체에서 전후 폐허화된 한국을 돕기 위해 원조금을 줘 간호사를 양성시켜 놓으니 선진국인 독일에 와 환자를 간호한다는 것은 인력기술을 착취하는 행위이므로 중지해야 한다는 거센 운동이 효력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덩달아 한국 종교단체와 일부 정부관리가 합세하면서 1968년을 기해 간호요원 파독이 중단되게 됐다.”(이수길, 1997, 187-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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