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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7-1화) 1970년 광부 파독 재개
  • 운영자
    조회 수: 322, 2015.08.29 22: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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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서독 경제의 불황과 석탄산업의 쇠퇴, 동백림 사건 등의 영향으로 중단됐던 광부 파독이 재개(再開)된 것은 1970년 1월의 일이다. 두 나라 사이에 놓여 있던 여러 난관은 1969년 4월 테오도르 테호르스트(Theodor Tehorst) 함본광산 사장이 방한하면서 매듭이 풀렸다. 그는 “광부 2000명을 신규 채용하고 싶다”고 한국 정부에 밝혔다.

     

    한국해외개발공사는 이에 1969년 12월 파독 광부 모집공고를 냈고, 1970년 1월 300명을 독일로 보냈다. 2차 광부 파독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 정부와 서독 정부는 1970년 2월18일 「한국 광부의 취업에 대한 한-독 정부간의 협정」(‘제2차 파독광부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 체결의 주체가 한국 정부와 독일 연방공화국 탄광협회였던 1차 광부 파독 때와는 달리 2차 때에는 두 나라 정부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후 광부 파독은 1977년까지 지속돼 △1970년 1305명 △1971년 982명 △1972년 71명 △1973년 842명 △1974년 1088명 △1976년 314명 △1977년 795명 등 모두 5397명이 독일 땅을 밟았다(재독한인연합회 편, 1987, 381쪽; 재독동포50년사 편찬위원회, 2015, 28쪽 참고).

     

    간호사 파독도 재개됐다. 민간차원에서 이뤄진 1960년대 후반과 달리 이번엔 국가 차원으로 추진됐다. 1969년 9월22일 주독 한국대사관과 독일병원협회(DKG)간 ‘한국 간호요원 독일 내 병원취업에 관한 절차’를 합의한 뒤 1970년 4월 간호사 832명, 간호보조사 875명 등 1707명을 시작으로 간호사 파독이 다시 시작됐다. 그해 6월엔 한국해외개발공사와 독일병원협회 간 ‘유자격 한국 간호원 및 간호보조원의 독일병원 취업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4년 독일에서 간호요원의 임금이 11%나 오르면서 간호사 파독은 줄었고, 1976년 62명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1970년부터 이때까지 7438명의 간호요원이 파독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재독한인연합회 편, 1987, 381쪽; 재독동포50년사 편찬위원회, 2015, 28쪽 참고).

     

    아울러 기계공, 병아리 감별사(鑑別師) 등 기술자들도 이 시기에 파독했다. 1971년 9월 조사에 따르면 바이에른 주에 240명을 비롯해 한국기술자 474명이 독일에서 일했다고 한다(외무부 영사국, 1971, 267쪽 참조).

     

    제2차 광부 파독은 제1차 파독과 여러 면에서 공통점(共通點)이 많았다. 정도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여전한 선발 과정의 난맥상과 형식적인 교육 △기본 고용기간 3년과 체류 연장의 원칙적인 불허 △대다수가 지하 채탄작업에 종사 △사회적 시장경제체계에 따른 임금체계 △광산연금보험 대신 특별회계 구성 △기숙사 생활 △체류 연장의 주요 방법으로 파독 간호사와 결합 등이 꼽힌다.

     

    차이점(差異點)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선발-교육과정의 혼선과 난맥상은 상대적으로 더 심해진 반면 서독 현지 생활은 훨씬 자유분방(自由奔放)해졌다. 선발과정은 응모요강과 자격이 자주 바뀌는 등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해본 교수의 지적이다.

     

    “제2차 파독광부 협정 체결 후 파독광부 선발요강은 종전과는 달리 혼선을 빚었다. 즉, 1972년 10월부터 1973년 11월까지 1년여 동안 응모 자격과 요강이 모집할 때마다 바뀌었다. 처음에는 응모 자격을 까다롭게 해 충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부족 인원은 그때마다 새 응모요강을 만들어 추가 모집했다. 1972년 10월부터 1973년 1월 사이 두 번에 걸쳐 광부 800여명을 선발하면서 처음엔 대한석탄공사 산하의 현직광부만 선발한다고 했다가 충원이 되지 않자 민영탄전 광부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도 충원이 되지 않자 이직한 지 1년 미만의 광부에게도 응모 자격을 주는 등 갈팡질팡했다.”(정해본, 1988, 77-78쪽)

     

    교육도 여전히 형식적이었다. 1965년 한국해외개발공사가 설립되고 동백림 사건의 영향으로 ‘소양(素養)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반공(反共)교육이 추가됐지만, 교육 내용은 여전히 형식적이었다는 평가다. 장재인의 증언은 이를 잘 보여준다.

     

    “훈련 첫날 폐광이 돼버린 갱도 속에서 우리 일행은 교육을 받았다. 도계에서 일주일 정도 생활하는 동안은 읍내가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숙집 단위로 식사를 끝내고, 오전 10시쯤 함께 잠깐 만나 양 소장의 독일 광부 체험담을 한 시간 가량 들어야 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 휴식에 들어갔다. 오후 동안에는 각자 개인의 신상문제를 한국해외개발공사 도계 출장소에서 상담을 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세탁을 비롯해 소일을 한 후 저녁식사가 끝나면 하숙집 대항 ‘독짓볼’이란 경기를 했다…어둠이 깔리는 도계읍의 몇 개 안된 막걸리 집은 탄광 실습교육을 위해 내려온 우리들로 항상 시끌벅적했다. 현지에서 주먹을 쓰는 건달과 거의 매일 저녁 치고받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교육생이 뿌리는 돈이 워낙 많았던 터라 경찰서에서도 웬만하면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는 형편이었다.”(장재인, 2002, 25-26쪽)

     

    특히 현장 교육에서 일부 관계자가 광부 교육생에게 금품(金品)을 상납(上納)받거나 향응(饗應)을 제공받았다는 증언도 잇따랐다. 교육생에게 의도적으로 탈락 가능성을 흘리는 방식으로 협박, 금품을 상납 받았다는 것이다. 1970년 7월 파독한 이들의 주장이다.

    “도계역에서는 양 소장이라는 책임자가 나와 근엄한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 소장은 주변을 훑어보는 우리를 무섭게 쏘아보며 일장 훈시를 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이제 시작일 뿐이며, 훈련 기간 중에도 자질이 없는 사람은 탈락돼 집으로 돌아갈 각오를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내용의, 겁을 주기에 충분한 훈시였다…한 집에 하숙을 하게 된 우리는 교육을 받기 하루 전날 밤 각자 만원씩 모아 양 소장을 찾아갔다. 상납을 받은 양 소장은 그때서야 농담을 건네면서 우리에게 긴장을 풀 수 있게 해줬다.”(장재인, 2002, 24-25쪽)

     

    2차 파독 광부들은 독일에서 1차 파독 광부에 비해 자취(自炊)생활을 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기숙사에서 생활했지만, 어느 정도 적응하면 기숙사에서 나와 개인생활을 했다.

     

    심지어 독일 광산 측은 1974년 방독한 한국해외개발공사 이사장에게 “한국 광부 35%만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나머지 65%는 개인숙소 생활을 해 결근율(缺勤率) 증가의 원인이 되고 있다”며 시정을 요구할 정도였다(정해본, 1988, 115-11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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