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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7-3화) 경험 차이에서 빚어진 ‘불법재판 사건’
  • 운영자
    조회 수: 105, 2015.08.29 23:54:55
  • 불법재판사건보도.jpg

     

    “최근 클뢰크너광산에서 한국인 광산 노동자들이 동료 노동자에게 사형을 언도(言渡)하고 자살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한국인 노동자들이 자기 동료에 대해 사형을 내리는 불법재판 재발을 막기 위해 어떤 방지 대책을 가지고 있습니까?”

     

    1972년 1월19일 서독 의회 하원 본회의장. 사회민주당(SPD) 소속의 바르세 하원 의원은 대정부 질문에서 알폰세 바이에르 노동성 차관을 상대로 이같이 추궁했다. 얼마 전 카스트롭라욱셀(Castrop-Rauxel)의 클뢰크너광산에서 일어난 한국인 불법재판 사건과 관련한 대응책을 물은 것이다. 바이에르 차관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동아일보』, 1972.1.25, 1면 참조).

     

    “사건 관련자는 독일 법률에 따라 의법 처리될 것이고, 불법 재판에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면 추방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 같은 사건은 한국인 광부들에게 일어나는 전형적 사건은 아닙니다.”

     

    서독 하원에서도 다뤄질 정도로, 1971년 12월 발생한 한국인 파독 광부의 불법재판 사건은 파독 광부 및 독일 사회를 강타했다. 아직까지 파독 광부 사회에서 이야기가 회자(膾炙)되고 있을 정도다.

     

    2차 파독 광부들은 정보의 축적과 성숙한 독일 사회의 배려, 독일 사회에 이미 정착한 1차 파독 광부와 간호사 등의 도움으로 비교적 쉽게 적응(適應)했지만 문화적 차이를 완전히 이해하고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독일 사회에 완전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회문화적 경험(經驗)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건은 1971년 12월23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딘스라켄시 경찰에 파독 광부 송모씨가 절도 등의 혐의로 체포되면서 시작됐다. 경찰은 클뢰크너광산 소속의 파독 광부 송씨를 백화점 6층에서 400마르크짜리 카메라 한 대를 훔친 혐의로 붙잡아 조사한 뒤 일단 숙소로 돌려보냈다. 송씨는 화순광업소에서 근무하다가 1971년 파독했다(장행훈, 1972.1.28, 3면; 백상우, 1997b, 218-219쪽 참조).

     

    이 같은 사실은 카스트롭라욱셀의 한국인 광산 노동자 사회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한국인의 긍지를 훼손했다는 비판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강력하게 응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결국 독일에서 한국인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자살을 권유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파독 광부들은 경찰 조사를 받고 풀려난 밤 송씨의 숙소로 찾아가 자살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송씨는 자살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광부들은 다음날 회의를 열고 갑론을박 끝에 송씨를 붙잡아 라인강 쪽으로 끌고 갔다. 라인강에서 자살을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한국 노동자가 이들의 행진에 가세하면서 대열은 순식간에 100여명으로 불어났다.

     

    시내에서 라인강까지의 거리는 약 2km. 파독 광부 100여명이 동료를 붙잡아 라인강 쪽으로 행진하자 독일 경찰은 긴장된 표정으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지상에선 순찰차가 줄지어 따랐고, 하늘에서는 헬기가 시위대열을 감시했다. 서독 경찰은 파독 광부의 행진을 만류했다. 격앙된 파독 광부들은 행진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혼란한 틈 사이에 송씨는 라인강으로 뛰어들었고 곧 경찰관과 한국인 통역의 도움으로 구출됐다. 경찰이 이와 동시에 파독 광부들의 진압에 나서면서, 파독 광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장행훈, 1972.1.28, 3면 참조).

     

    하지만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파독 광부들의 행동은 ‘인민재판(人民裁判)’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 사적(私的)인 사법권(司法權) 행사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행위였다. 범죄의 판별과 징벌의 결정, 그에 따른 형 집행은 모두 사법적 절차에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범죄로 해석될 여지가 컸던 것이다. 백상우의 회고다.

     

    “죄인은 법이 다스리는 것인데, 우리는 법인격(法人格)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인민재판식으로 단죄하려 했다. 흥분된 마음을 달래려 하는 방법이었지만 법치국가의 입장에선 오히려 우리 한인들이 범행을 저지르는 격이 됐다.”(백상우, 1997b, 219쪽)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사법 당국은 불법재판 사건에 연루된 파독광부 100여명 가운데 사진 체증 등을 통해 가담이 확인된 10명을 붙잡아 살인미수(殺人未遂) 등의 혐의로 집중적으로 조사를 벌였다. 광부들은 조사에서 파독 광부들이 송씨를 실제로 죽일 의도가 전혀 없었고 그가 라인강에 빠져 위험할 경우 구조반을 가동해 구조하기로 약속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살인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사건의 파장(波長)은 적지 않았다. 한국과 서독 언론은 사건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다루면서 사태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서독 하원에서는 사회민주당 바르세 의원을 비롯해 일부 의원이 대정부질문에서 파독 광부의 불법재판 문제를 추궁하기도 했다. 연루된 파독 광부들의 추방설(追放說)이 거론되자, 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 측은 빌리 브란트 서독수상에게 계속 일할 수 있도록 선처해달라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결국 참여 광부들의 순수한 동기와 의도, 반성하는 자세, 적극적인 수사 협조, 김영주 주독 한국대사의 노력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지면서 자치회장인 유명준씨가 광산을 그만두는 선으로 사건은 일단락(一段落)됐다(장행훈, 1972.1.28, 3면; 『동아일보』,1972.1.20, 1면;『중앙일보』,1972.1.20, 7면;『중앙일보』,1972.1.22, 7면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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