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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7-4화) “기쁨과 슬픔을 함께” 그뤽아우프회 창립
  • 운영자
    조회 수: 215, 2015.08.30 00: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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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12월22일 서독 본시의 근교인 지그부르크(Siegburg). 주로 퇴직자 출신의 파독 광부들이 참여한 가운데 ‘재독한인 글뤽아우프친목회’(현 재독한인 글뤽아우프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회장으로 조희영 박사가 선출됐다. 창립총회에 참가한 파독 광부들은 이날 국내 한 탄광에서 폭발사고로 숨진 유가족에게 보내기 위해 1400마르크도 모았다. ‘글뤽아우프(Glueckauf)’의 뜻은 ‘행운을 갖고 위로’라는 뜻으로, 광산 노동자들이 탄광으로 들어가는 동료에 대해 무사고를 기원하는 의미로 건네는 인사말이다. 광산 노동자를 상징하는 말쯤 되겠다. 한국인 파독 광부 또한 항상 이 인사를 나눴다.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던 가운데 1973년은 파독 광부의 역사에서 잊힐 수 없는 해이다. 한국인 파독광부의 자주적인 조직인 재독한인 글뤽아우프회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비록 초기에는 친목회(親睦會)라는 명칭을 내걸었지만, 파독 광산 노동자들의 자주적이고 대중적인 조직이었다는 점에서 파독 광부사의 한 페이지를 열었다는 평이다. 나중에 ‘친목회’라는 단어가 빠지고 ‘재독한인 글릭아우프회’로 바뀌게 됐다.

     

    재독한인 글뤽아우프회는 초창기에는 주로 퇴직자 중심으로 모임이 운영됐다. 모임 결성을 주도한 조희영도 퇴직광부였고, 회원 자격도 ‘광산에 파견돼 소정의 근무를 마친 자’로 규정해 광산 퇴직자로 제한했다.

     

    결성 배경은 파독 광부간 친목과 이를 통한 한인사회 기여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퇴직 파독 광부들은 주로 아내의 근무지를 따라 직장을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히 뿔뿔이 헤어질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서로간의 만남이 그리웠던 것이다. 홍종철의 기억이다.

     

    “3년간의 광산 계약을 마치고 결혼한 우리는 주로 아내의 근무지 위치로 뿔뿔이 헤어졌다. 직장을 구하고 새 삶의 터전을 닦았다. 야생마처럼 방향 감각도 없이 이리저리 뛰어 다니다가 가정이라는 것이 생기니 마음의 안정도 오고, 또 혼자가 아니라는 의무감 같은 것도 생겼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역시 타국 생활은 외롭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지하 막장에서 동고동락하던 친구가 그리워졌다. ‘만나자, 그래서 내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들의 이야기도 듣자, 기쁨도 슬픔도 같이 나누고 외로움일랑 서로 달래주자’. 이러한 충동이 솟구쳤다. 1970년대 초 조희영 박사 등이 주도해 퇴직광부 친목회를 발족시켰다. ‘지하에서 죽지 않고 무사히 올라온’ 우리는 광부의 인사를 따 친목회를 글뤽아우프라고 명명했다. 가끔 만나서 체육 행사도 하고 야외에서 불고기 파티도 했다.”(홍종철, 1997, 184-185쪽)

     

    조직의 목적은 ‘친목과 협동심’을 공고히 하는 것으로 했다. 주요 사업으로 ‘문화·사회·체육·친선 등 본회의 목적을 달성함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업’이 채택됐다. 친목을 위한 체육문화 활동과 야유회, 각종 성금 기탁 등이 이뤄졌다.

     

    조희영은 글뤽아우프회 창립을 주도한 뒤 초대 회장과 2대 회장을 맡으며 조직 기반을 다졌다. 그는 광산에 근무한 지 3일 만에 아헨공대를 찾아가 곧바로 랭귀지스쿨에 등록했다. 탄광소장까지 소개 받아 밤근무에 편성돼 낮에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조희영은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가 앞장서 독일에서 체험적으로 배운 ‘독일 정신’을 전파해 조국 근대화에 기여하자고 주장했다. 그가 1975년 5월에 발간된 회지 『글뤽아우프』 창간에 즈음해 기고했던 글의 일부다.

     

    “1200m 지하에서의 고된 근로생활은 우리에게 심신을 연마하게 해주었고, 근대화를 위한 정신혁명의 일역을 맡아야 할 사명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글뤽아우프 회원 모두는 지난날 수난을 참고 견디어낸 것만으로 만족하는 소극적 자세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며, 이 고난의 극복을 창조적으로 이용함에 그 참뜻이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우리 주위와 조국 근대화를 자극할 수 있는 정신적인 바람은 우선 근면한 개개인의 생활에 두어져야 하겠음을 전제하고서 출발해야 할 줄 믿는다. 서구의 선진 제국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독일 민족의 발전이 그들 국민 각자의 근면 성실한 생활규범이 뒷받침하고 있음을 우리가 부인해서는 안 될 줄 믿는다. 또한 근면을 토대로 그들의 생활 규범이 근대화를 해칠 탈선가능성과 한계를 최소한으로 좁혔을 것이라는 추상적 당위를 인정해야 할 줄로 믿는다…여기에 우리의 구체적 사명이 분명해진다. 즉, 체험에서 습득한 근면 성실한 생활 규범을 내 조국의 근로대중에게 옮아 심어야 할 대사업인 것이다.”(조희영, 1997, 171쪽)

     

    조희영은 특히 1975년 6월 재독한인연합회 제13차 정기총회에서 회장에 피선되면서 파독 광부가 재독 동포사회를 주도하는데 역할을 했다. 1963년 10월 유학생 중심으로 조직된 ‘재독한인연합회’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본격적으로 가세하면서 조직이 확대 강화됐다. 재독한인연합회는 전국체전 참가와 8·15광복절 행사 등 문화체육 활동을 매개로 한국과 연결되는 주요 통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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