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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7-10화) “광주여, 십자가여!” 힌츠페터에게 진 빚
  • 운영자
    조회 수: 722, 2015.08.30 00:40:41
  • 베트랑겐과 힌츠페터-KBS스페셜 캡션.jpg

    <힌츠페터(오른쪽)와 베르트람-KBS스페셜 화면 캡처>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붉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김남주, 「학살1」에서

     

    “아빠, 텔레비전에서 한국 태극기가 나와요. 태극기가….”

     

    1980년 5월22일 오후 8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州)의 공업도시인 레버쿠젠의 집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네살배기 딸이 놀란 눈으로 송준근에게 달려오며 소리쳤다. 주말 한글학교에 다니고 있던 딸이 TV 속에서 태극기를 알아본 것이다. 태극기가? 왜? 일을 마치고 회사에서 돌아온 송준근은 이때 집에서 승용차를 청소하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 딸의 말대로 ARD(독일 제1공영방송)의 NDR(북부독일방송)에는 태극기가 선명하게 나왔다. 시체 위에 놓여진 태극기, 관 위에 피 묻은 태극기였다. 시위하는 시민,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군인, 군인들의 칼과 총 등에 의해 숨진 사람들, 사람들 속에 포함돼 무차별적으로 맞는 대학생…. 5·18 광주민주항쟁(光州民主抗爭)이 세계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텔레비전은 같은 화면을 반복해서 내보냈다. 시간대를 달리해 뉴스 시간마다 톱뉴스로 계속 방송됐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1970년 파독한 송준근은 광주에 살고 있는 사촌형이 걱정됐다. 국제 전화를 돌렸다. 전화는 끊겨 연결되지 못했다. 결국 사촌 형과는 광주민주항쟁이 종료된 뒤에야 통화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는 그의 질문에 사촌형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상황이 너무나 엄중했기 때문이었다. 사촌형은 다만 “후손을 건강하게 잘 키우라”는 말만 반복했다.

     

    한국인 광산 노동자 사회도 발칵 뒤집혔다. 광주에 친척이 살고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상황 파악에 분주했다. 사태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들은 모두 암울한 시대에 절망했다.

     

    광주의 진실(眞實)은 파독 광산 노동자, 간호사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독일에서 방영된 광주의 진실은 다시 한국으로 전달됐고 한국의 대학생, 노동자에게 충격을 주며 1980년대 내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젊은 가톨릭 신부들이 독일에서 광주항쟁을 기록한 영상 테이프를 구해 한국에 들여온 것이다. 테이프는 은밀하게 유통되기 시작했고, 영상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은밀하게 상영됐다. 영상을 본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외치기 시작했다. 광주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씨앗이 됐다.

     

    “그때 다른 한 신부님이 화면에 보였네. 독일에 체류하던 신부님이셨네. 그는 독일에서 유리겐 힌츠페터가 타전한 그 뉴스를 텔레비전에서 보고 한국에 소식을 알렸다고 했네. 다른 젊은 신부님들이 투옥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필름을 독일에서 한국으로 날랐고 그렇게 우리가 보았던 그 비디오가 완성된 것일세. 독일 기자는 한국에서, 한국 신부는 독일에서 그렇게, 어둠 속에서 빛 속으로 진실을 가져다놓았다.”(공지영, 2004, 88쪽)

     

    광주의 진실이 전 세계에 빨리 알려지게 된 데에는 ARD-NDR의 도쿄특파원이었던 카메라 기자 유리겐 힌츠페터(Juergen Hinzpeter)의 기자정신(記者精神)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0년 5월22일 서울 김포공항. 힌츠페터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일본항공(JAL) 도쿄행 1등석 검문대 앞에 섰다. 손에는 파란색 리본으로 화려하게 꾸민 과자봉지 선물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과자 선물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광주에 잠입해 찍은 이틀간의 광주의 진실이 담긴 필름이었다. 그는 필름을 단단한 금속캔 속에 포장해 과자더미 속에 넣었다. 친구의 결혼선물로 위장한 것이다(Hinzpeter, 1997, 119-130쪽 참조).

     

    광주의 진실이 담긴 필름은 힌츠페터와 함께 무사히 김포공항의 검문대를 통과, 한국에서 일본으로 옮겨졌다. 필름은 다시 일본에서 독일로 보내졌다. 그리고 독일 현지에서 위르겐 베르트람 등의 편집을 거쳐 전 세계로 타전될 수 있었다.

     

    힌츠페터가 이에 앞서 동료 헤닝과 함께 항쟁이 벌어진 광주에 들어간 것은 5월20일 화요일 오전이었다. 택시 운전사 김사복의 도움과 “책임자를 찾으러 간다”고 기지를 발휘, 광주 시내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힌츠페터의 눈 앞에 펼쳐진 광주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상무대 병원에서 태극기에 둘러쌓인 채 숨진 사람들, 숨진 사람들 앞에서 오열하는 가족들, 그 가족들 옆에 놓여진 몽둥이 자욱이 선명한 어린 학생들의 시체….

     

    “내 생애에서 한 번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도 이렇듯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가슴이 너무 꽉 막혀 사진 찍는 것을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Hinzpeter, 1997, 127쪽)

     

    힌츠페터는 그래도 카메라를 다시 찍기 시작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울분을 참으며 역사의 현장을 필름에 담았다. 전두환 장군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잔인함에 치를 떨어야 했고, 광주 시민의 용기 있는 저항에 처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파괴된 광주 MBC 텔레비전 방송국, “군인들에 의해 광주 시민들이 무참히 짓밟혔고 이로 인해 항쟁으로 치달았다”고 증언하는 두 명의 미국인, 시내 교차로 근처의 높은 바리케이드와 전소된 군대 트럭, 평상시처럼 활발한 시장….

     

    힌츠페터는 광주의 현장을 담은 필름을 필름 캔과 필름 박스에 담아 아직 찍지 않은 필름처럼 위장했다. 전날 찍은 다섯 개의 릴을 몸속 티셔츠와 셔츠 속에 숨겼다. 왔던 길을 거슬러 삼엄한 군부의 경계를 뚫고 서울로, 도쿄로 향했다. ‘광주의 진실’은 이렇게 해서 ARD-NDR 방송을 타고 독일로, 세계로 알려졌다.

     

    힌츠페터에 의해 광주의 진실이 알려지자, 파독 광부와 간호사 사회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전화를 걸어 텔레비전에서 본 광주의 모습에 울분을 토로했다. 그들은 서명운동을 비롯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5월30일에는 독일 현지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힌츠페터는 그해 9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판결을 받자 「기로에 선 한국」이란 4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군사정권의 폭압 상을 알리기도 했다. 광부와 간호사 등 동포들은 6000여명의 서명을 받아 빌리 브란트 수상에게 보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명운동을 건의했다. 11월 9일에는 ‘김대중을 구출하자’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빌리 브란트는 세계를 상대로 김대중 구명을 호소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이 같은 국내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지는 나중에 ‘5월 민중제’로 승화됐다. 광주의 진실은 한국 국민뿐만 아니라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광주의 충격과 함께 나는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사회와 정치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광주는 나에게 정치의식을 일깨워준 아주 중요한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광주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고유문화에 대한 관심도 가지게 됐다. 연극과 강연회, 한국문제 토론회, 편지보내기 운동 등을 통해 많은 독일 사람과 한국 사람들이 한마음이 돼 우리 고국의 장래를 염려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김정숙, 2002.12.2, 22면)

     

    세계와 한국, 재독 광부와 간호사 사회에 광주의 진실을 알린 힌츠페터는 원래 의학도였지만 ‘68운동’ 이후 기자로 전직했다. 역사 현장을 기록하고 싶어서였다. 1968년 카메라기자로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기 시작한 이후 1978년 도쿄특파원으로 부임하는 등 19년 동안 아시아에서 활동했다.

     

    힌츠페터 이외에도 많은 독일 언론인들이 광주의 진실을 보도했다. 페터 크로메(Peter Crome)는 「혁명 정신이 우리를 엄습하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5월27일자 『슈투트가르트차이퉁(Stuttgarter-zeitung)』에 실었다. 그가 계엄군의 봉쇄를 뚫고 광주 시내로 극적으로 들어가는 다음의 장면은 지금 읽어도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야말로 ‘기자 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기적이었다.

     

    “군대가 점점 포위망을 좁혀가고 있는 광주시로 들어가고자 노력한 지 네 번째 시도에서 우리는 행운을 잡았다. 숲이 우거진 산길 위로 난 자갈이 깔려 있는 오솔길에서다. 비스듬히 세워 놓은 트럭 뒤에서 12명의 군인들과 함께 그곳을 감시하고 있던 대위 한명이 우리들을 도시 안으로 들어가게 허락했다. 2명의 ARD카메라 맨과 운전사 그리고 나, 모두 4명은 보도를 위해 광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며칠 전에 실종된 우리 상관을 찾으러 간다고 믿도록 설득했다. 부하의 충성심을 다하려는 우리를 대위가 이해해 줘, 우리는 광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도시 외곽 인근에서 가장 어렵고도 마지막의 장애물을 우리는 정보요원 덕분에 통과할 수 있었다. 양말 속에 신분증을 감추고 있던 정보요원은 남몰래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 자동차를 얻어 타고 싶어 했다. 우리는 그를 태워준 대가로 무사히 시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시내로 잠입해 대중에게 사태에 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수많은 비밀 정보요원 가운데 한명이었다.”(Crome, 1998, 338쪽)

     

    광주의 여운이 남아 있던 1980년 10월. 마지막으로 독일로 떠났던 한국인 광부마저 3년 계약이 끝나가고 있었다. 조명을 받았던 첫 파독 때와는 달리 국민도, 언론도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지 않았다. 물론 잠시 기억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의미 있는 끝은 언젠가 반드시 기억되게 마련이지만.

     

    계약 기간이 완료되자 많은 사람들은 조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상당수는 계속 독일에 남아 지하에서 일을 하거나, 다른 직종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재독 동포로 살아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독일에 남은 파독 광부도 점점 줄어갔다. 주독 한국대사관 등에 따르면 1984년 12월31일 기준으로 독일 광산에서 일하고 있던 한국인 광산 노동자는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광산의 정용기를 비롯해 루르 지역에 153명과 에슈바일러 광산에 50명 등 203명에 불과했다(정해본, 1988, 7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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