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메뉴 건너뛰기

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8-2화) 한-독 관계 발전에도 도움
  • 운영자
    조회 수: 77, 2015.08.30 22:49:24
  • 19640204한독간투자증진협정서명식.jpg

     

    광부 파독과 간호사가 단순히 한국 경제성장에만 기여한 것은 아니다. 한국과 독일의 양국 관계 증진(關係增進)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과 1967년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 대통령의 방한 등 양국 대통령이 상호 교차방문하면서 관계를 개선시킨 바탕에는 파독 광부 및 간호사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박래영의 지적이다.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의 파견이 실현되면서 두 나라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정부 간 관계도 더욱 긴밀해졌다. 초기 우리나라에서는 광부 파독을 정부가 직접 맡았기 때문에 많은 교섭이 우리나라 정부와 서독 민간단체 사이에서 이루어졌고, 서독 정부와의 직접적인 관계는 많지 않았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수가 많아지면서 정부 간 관계도 다양해졌고 방문 기회도 많아지자 드디어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이 실현되는 등 외교관계의 발전이 있었다. 한국과 서독은 그 이전에는 소수의 유학생을 파견하고 약간의 교역이 있는 정도에서 관계가 유지됐을 뿐이었지만, 서독에 취업한 한국인 수가 많아짐에 따라 국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고, 종국에는 대통령의 방독까지 이른 것으로 봐야 한다.”(박래영, 1988, 570쪽)

     

    한국과 독일의 관계발전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교역이나 자본투자 등 경제 관계 증진으로 이어졌다. 독일은 현재에도 한국의 주요 교역국(交易國)의 지위를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고, 유럽연합(EU) 국가 중에선 여전히 최대 교역국 위상을 지켜오고 있다.

     

    한국은 2011년 3월 기준 독일과의 교역에서 △수출 95억 달러 △수입 169억 달러 △무역수지 마이너스 74억 달러를 각각 기록, 10대 교역국의 지위를 차지했다. 특히 수입 규모에서는 6위, 무역수지 적자 규모에서는 4위를 각각 차지했다(한국무역협회, 2011.3.29; 외교통상부 통상기획홍보과, 2012.2, 10쪽 참고).

     

    최근에는 중국과 인도 등이 급부상하면서 교역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추세이지만, 이전 시기 독일의 비중은 막중했다. 2000년 한국과의 교역 규모에 있어 독일은 미국, 일본, 중국, 홍콩, 호주에 이어 6위였지만, 과거의 수치까지 합친 총 교역량은 125억 달러로 한국의 4대 교역국이었다. 한국도 독일에 있어 미국, 일본, 네덜란드에 이어 제4위 투자대상국이었고,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제1의 투자대상국이었다(백영훈, 2001, 98-99쪽 참조).

     

    양국 문화 교류(交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독일인과 독일 사회, 독일에 진출한 제3국인에게 한국과 한국 문화를 알리는 전도사(傳道師)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진정한 한국의 사상과 문화의 전파자라는 지적은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역으로 해외 경험이 많지 않던 한국인들에게 간접적인 해외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 많은 한국인은 이들을 통해 독일 또는 유럽에 대한 세계주의적 사고를 축적했다.

     

    “직접적인 해외취업의 경험이 없는 나머지 가구도 거의 예외 없이 해외취업의 간접(間接) 경험자들이다. 일가 친척이나 친지들 가운데 해외 취업 경험자가 없는 가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가족이나 친지인 해외취업 경험자로부터 현지 생활의 생생한 경험을 밤새워 듣기도 했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현지의 힘든 작업이나 고통스러운 악조건의 환경만이 아니었고 현지의 풍물과 관습, 그곳 사람들의 생활과 접촉 경험도 포함됐다. 여기에 신문이나 잡지 또는 TV에서 접할 수 있었던 해외취업의 실상까지 보태면 거의 모든 국민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해외취업을 충분히 경험한 셈이다. 해외진출에 대한 직접 또는 간접의 폭넓은 경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국제화 시대를 재촉하면서 국민의 해외진출을 촉진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외국과 비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결코 나쁜 환경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인식을 갖도록 하는 데도 크게 기여한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해외로 나가는 것은 특정 계층의 특권인 것으로 인식돼 왔고, 해외여행만 할 수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보통 사람으로서 해외에 나가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매우 두려운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폭넓은 해외취업 경험을 거치면서, 해외진출은 무조건 좋은 일이라는 생각도, 두려운 일이라는 생각도 없어졌다.”(박래영, 1988, 562쪽)

     

    물론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 광부 파독의 역사적 성취(成就)를 재검토해보면, 기본적으로 1963년 12월 한국 정부와 독일 연방공화국 석탄협회간 체결한 「독일탄광에서 한국 광부의 잠정적 취업계획에 관한 한-독간의 협정」(‘제1차 파독광부 협정’)의 목적 및 목표를 100% 충족시킨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양측은 ‘제1차 파독광부 협정’에서 광부 파독의 목적을 ‘직업상의 기술 습득과 지식 향상’(제1장)이라고 규정했지만, 한국은 광업 기술의 습득과 지식 향상이라는 전략적인 성과로 연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부 파독을 국내 실업문제 해결과 외화획득의 수단으로만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독일 또한 이 같은 한국 정부의 현실과 한계를 사실상 방임(放任)해버려 기술과 지식의 전수라는 ‘파독광부 협정’의 의무(義務)를 다하지 못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즉 독일도 자국의 부족한 노동력 문제의 해결에 만족해 버린 것으로 보여서다. 독일 정부와 사회가 한국과 한국인 노동자에 대해 전략적인 시각과 연대의식이 부족했다는 다음의 주장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1950-60년대 외국인 노동자들의 수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서독 정부와 여러 관련 기관은 이들 ‘이질적인 존재’의 유입에 따른 문제를 깊이 검토한 흔적이 별로 없다. 독일은 유럽의 부국 가운데 해외 식민지를 가장 적게 갖고 있던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그만큼 외국인 노동자-당연히 경제적 사회적으로 하층일 수밖에 없는-문제를 야기할 소지가 인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정당과 노조, 사용자단체, 심지어 교회나 각종 복지 관련 이익단체까지도 이들 외국인 노동자를 보는 시각은 그저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일시적으로 불가피하게 필요한 존재 정도의 수준이었다.”(재독한인글뤽아우프친목회, 1997, 87쪽)

     

    즉, 한국과 독일 정부 모두 처해진 현실 여건에 휘둘리면서 수십 년 이상을 내다보는 장기적인 비전과 전략(戰略)을 갖지 못한 채 ‘파독광부 협정’의 목표를 실행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판단이다.

     

댓글 0 ...

위지윅 사용
번호
제목
닉네임
58 운영자 394 2015.09.05
운영자 77 2015.08.30
56 운영자 994 2015.08.30
55 운영자 220 2015.08.30
54 운영자 722 2015.08.30
53 운영자 193 2015.08.30
52 운영자 146 2015.08.30
51 운영자 171 2015.08.30
50 운영자 263 2015.08.30
49 운영자 215 2015.08.30
48 운영자 592 2015.08.30
47 운영자 105 2015.08.29
46 운영자 126 2015.08.29
45 운영자 322 2015.08.29
44 운영자 198 2015.08.15
43 운영자 252 2015.08.15
42 운영자 252 2015.08.15
41 운영자 757 2015.08.15
40 운영자 257 2015.08.14
39 운영자 354 2015.08.14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