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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8-4화) 독일에서 이미륵을 되살리다
  • 운영자
    조회 수: 272, 2015.09.05 20:23:56
  • 이미륵10.JPG

     

    1989년 3월20일 토요일 오후 3시, 독일의 남부 도시 뮌헨에서 10여km 떨어진 그래펠핑(Grafelfing)의 공동묘지(共同墓地). 정문에서 왼쪽으로 꺾이는 곳에 시멘트로 만들어진 묘비 앞에 촛불이 켜졌다. 묘비 앞 하얀 종이에 놓인 오징어 다리 위로 태양이 작렬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한국인 7-8명이 차례로 소주잔을 올리더니 재배(再拜)를 하기 시작했다. 뮌헨 시내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송준근과 민영규, 아우그스부르크시에서 달려온 전동문과 강원식 등 파독 광부들이었다. 이들이 제사를 지낸 묘비에는 선명하게 한문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미경(李儀景)’. 문학을 통해 한국을 독일 사회에 알린 망명작가 이미륵(李彌勒)의 본명이었다. 이날 행사는 재독 동포들이 자발적으로 이미륵 묘지에서 그를 추모하며 가진 첫 제사였다.

     

    이후 이미륵이 세상을 떠난 3월20일(양력)이 끼여 있는 토요일 오후 3시면 어김없이 이미륵의 제사가 있었다. 참여자도 차츰 늘어났다. 제사가 이어지면서 이미륵 이야기는 동포사회와 독일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퍼져갈 수 있었다.

     

    10년 후인 1999년 3월 독일의 뮌헨. 이미륵 박사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뮌헨 시내 곳곳에서 열렸다. 강연회와 기념 공연도 열렸다. ‘이미륵상’ 수상식이 있었고, 유품도 전시됐다. 언론보도의 일부다.

     

    “첫날 강연회에서는 성신여대 독문과 정규화 교수가 ‘이미륵-그의 문학 활동과 휴머니즘’, 본(Bonn)대학 알브레이히트 후베 박사가 ‘동양과 서양의 문화중재자 이미륵’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국립국악원 정가정악단의 기념공연이 이어졌다. 이날 행사에는 독일인과 한국인 약 400명이 참석, 이미륵의 삶과 문학을 회고하고 그의 넋을 기렸다. 13일에는 제1회 이미륵상 수상식이 열린다. 1960년대 독일 유학시절부터 30여 년간 이미륵을 추적해온 이미륵 연구의 권위자 정규화 교수, 그리고 지난해 12월 83세의 일기로 작고할 때까지 이미륵을 기리기 위해 독일에서 많은 사업을 벌인 루돌프 고스만씨가 수상자로 결정됐다. 이와 함께 괴테포럼 전시실에서는 이미륵의 육필원고와 사진자료, 서예작품, 서한, 논문 등 80여점의 유품이 5일간 전시되고 있다.”(김경석, 1999.3.13)

     

    독일 사회에서 이미륵이 이처럼 자리 잡게 되는 데에는 정규화와 전혜린 등 이미륵 연구자뿐만 아니라 송준근을 비롯한 파독 광부의 힘도 적지 않았다. 연구자들이 학문적으로 이미륵을 조명했다면, 파독 광부들은 현실적인 문화와 역사로 정착(定着)시켰다. 만약 파독 광부가 없었다면, 이미륵의 대중적인 정착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지적이다.송준근이 이미륵 제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1986년 11월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어느 날 오전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뮌헨을 빠져나와 남서쪽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10여분 뒤 차가 멈춘 곳은 그래펠핑 묘지의 이미륵 묘소였다. 산책을 겸해 자녀들에게 교육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미륵을 추모함으로써 자녀에게 한국혼(韓國魂)을 불어넣으려는 심산이었다. 묘비 앞에는 장미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이후에도 계속 장미꽃이 놓여 있었다.

     

    “2, 3년 동안 계속 산책을 왔다. 비록 묘소는 초라했지만, 누가 다녀갔는지 항상 꽃이 놓여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곳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독일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독일 사람들은 이미륵을 사랑하고 있었다.”

     

    송준근은 독일인들에게 사랑받는 이미륵의 제사를 지내주고 싶었다. 이미륵의 제삿날을 알아보니 3월20일. 그는 파독 광부를 중심으로 동포들에게 3월20일 전후에 제사를 지내자고 제안했다. 먼저 1차 파독 광부 민영규에게 제사 계획을 알렸다. 민영규는 좋다고 답했다. 이렇게 해 이미륵의 제사가 시작됐다.

     

    파독 광부들의 이미륵 제사에 독일인도 하나둘 참여하기 시작했다. 제사가 거듭되면서 이미륵은 동포사회와 독일 사회에 확고하게 정착하게 됐다.

     

    현재의 이미륵 묘소는 1995년 이장(移葬)된 것이다. 이장 과정에서도 송준근의 남모르는 노력이 있었다. 1994년 7월 어느 날. 그는 여름방학을 맞아 이미륵의 묘소를 찾은 정규화 교수에게 이미륵 묘소의 이장을 제의했다. 송준근의 기억이다.

     

    “(묘지내) 장소가 너무 협소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람이 20명만 모여도 설 곳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옆 자리까지 침범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다 비석이 돌이 아니라 시멘트였다.”

     

    그의 얘기를 들은 정규화는 한국으로 돌아와 청와대를 비롯해 요로(要路)에 이미륵의 묘소 이장을 청원했다. 그와 정규화의 노력으로 한국 외무부는 이장하는 데 1만 달러를 지원해줬다. 한국 정부와 서항석 사장이 운영하는 거푸집회사 ‘페리’의 도움으로 비석은 한국에서 공수됐다. 이렇게 해서 이미륵의 현재 묘가 탁 트인, 양지바른 곳으로 이장됐다. 한국 전통 비석도 세워졌다. 옆에는 한국 ‘크리스마스나무’가 묘소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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