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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8-6화) 이미륵 되살린 연구자, 정규화와 전혜린
  • 운영자
    조회 수: 504, 2015.09.05 20:35:39
  • 전혜린-그여자전혜린 캡처.jpg

    <동영상 '그여자전혜린' 캡처>

     

    송준근이 추모 행사를 통해 이미륵을 독일 사회에 대중적으로 뿌리내리게 했다면, 이미륵에 대한 학문적 토대를 쌓은 사람은 정규화 전 성심여대 교수와 수필가이자 번역가인 고(故) 전혜린(田惠麟·1934-1965)이었다.

     

    정규화는 『무던이』 『이야기』 『어머니』 등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던 이미륵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이미륵의 친구와 후손 70여명을 만나 그의 삶을 추적하고 이미륵의 삶을 복원하려 힘쓰기도 했다. 이미륵 탄생 100주년을 맞은 1999년 3월 제1회 ‘이미륵상’을 수상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외국어대 출신인 정규화는 1960년대 뭔헨으로 유학을 갔다. 유학시절 재독한인회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 간부를 역임하기도 했다.

     

    정규화가 이미륵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뮌헨대 근처 아말리엔가 65번지에 위치한 고서점 ‘뵐플레(Wolfle)서점’의 주인 로테 뵐플레(Lotte Wolfle․작고)를 만나면서부터다(김경석, 1999.3.13; 정규화, 2012, 13-14쪽; 정규화·박균, 2010, 300-301쪽 등 참조). 뮌헨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뵐플레 여사는 1920년대 후반부터 부친이 경영하던 고서점을 돕다가 서점 운영을 이어가게 됐다. 정규화는 어느 날 서가에서 책을 찾으려고 기웃거리다가 주인인 뵐플레 여사의 눈에 띄었다. 박사 학위를 가진 뵐플레 여사는 정규화에게 다가와 다정스럽게 물었다.

     

    “실례합니다만, 혹시 한국 분이 아니십니까?”

     

    당시에는 독일을 찾는 한국인이 많지 않고 일본인들이 더 많을 때이기에, 독일 사람들은 아시아인을 만나면 보통 ‘일본인이 아닌가’ 라고 묻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한국인이 아닌가’ 라는 물음에 정규화는 다소 의아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밝게 웃으며) 그렇지요, 맞지요? 여러 해 전에 저희들에게 한자와 서예를 가르쳐 준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한국 분이었어요.”

    “그게 도대체 누구신데요?”

    “이미륵 박사라고, 아주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뵐플레 여사는 이미륵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줬다. 1920년대 후반 이미륵을 처음 만났던 기억, 서점을 찾아 문학과 동물학 교양서적을 샀던 이미륵의 모습, 1주일에 한 번씩 한문과 서예를 가르쳐줬던 얘기, 정치와 문학에 대해 토론을 벌인 경험, 이미륵의 마지막 모습…. 정규화는 뵐플레 여사의 손에 잡힐 듯한 설명에 깜짝 놀랐다.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증언(證言)이었다. 뵐플레 여사는 1920년대 아버지의 서점 운영을 도울 때부터 이미륵이 서점에 자주 찾아와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한국인 가운에 이렇게 독일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니.

     

    1965년 3월 어느 날. 정규화는 그래펠핑에 있는 이미륵 묘소를 찾았다. 잡초가 우거진 묘지였다. 그는 이미륵의 묘를 어루만지며 이미륵 연구(硏究)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정규화는 이후 이미륵 연구에 매달렸다. 도서관에서 이미륵의 작품을 찾아냈고, 이미륵에 대한 증언이라면 수만리 먼 곳을 찾아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내마저 이런 그의 모습에 짜증을 낼 정도였다.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송준근의 평가다.

     

    “이미륵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은 정규화 교수가 거의 다 했다. 이미륵의 작품을 발굴하고,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했으며, 그의 삶까지도 추적했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의 이미륵 또한 없을 것이다.”

     

    정규화에 앞서 이미륵을 주목한 사람은 ‘불꽃 같이 살다간 여성’ 전혜린이었다. 1960년대 뮌헨 네오폴드 거리에서 생활했던 그녀는 1959년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우리말로 처음 번역 출간했다. 그녀의 번역으로 이미륵은 한국에 대중적으로 알려질 토대가 쌓였다.

     

    전혜린도 고서점에서 이미륵의 얘기를 처음 들었다고 한다. 아마 뵐플레 서점이었을 것이고, 로테 뵐플레 여사에게서 이미륵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어느 헌 책방에서는 주인과도 이내 친숙하게 돼 재독작가였던 이미륵의 이야기도 듣게 됐다. 뒷날 전혜린이 『압록강은 흐른다』를 번역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정공채, 2002, 29쪽)

     

    게다가 전혜린도 그래펠핑 묘지에서 이미륵의 향기를 느꼈다는 점에서, 송준근과 정규화의 경험과 너무나 흡사하다.

     

    1934년 평남 순천에서 전봉덕의 8남매 중 큰 딸로 태어난 전혜린은 1965년 1월10일 31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많은 일화를 남겼다. 특히 1952년 한국전쟁 중의 임시 수도 부산에서 수학과목이 0점이었음에도 전체에서 2등으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 것은 하나의 전설로 남아있다. 서울대 법대 3학년이던 1955년 10월 독일 유학을 갔고, 유학 중에 결혼해 딸까지 낳았다가 1964년 이혼하기도 했다(장석주, 2000, 70-72쪽 참조).

     

    전혜린의 번역 작품으로는 이미륵 작품 외에도 루이저 린저(Luise Rinser)의 『생의 한가운데』,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데미안』, 하인리히 뵐(Heinrich Boll)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이 있다. 그는 이들 책의 번역을 통해 현대 독일을 한국에 알렸다. 저서로는 유고 수필집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일기 모음집 『이 모든 괴로움을 다시』 등이 있다.

     

    전혜린은 1965년 1월 서울 명동의 술집 ‘은성’에서 술벗 조영숙 기자 앞에서 자작시를 읊었다.

     

    몹시 괴로워지거든 어느 일요일에 죽어버리자

    그때 당신이 돌아온다 해도

    나는 이미 살아있지 않으리라.

     

    전혜린은 자작시처럼 약물 과다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는 불꽃 같은 생을 버렸고, 그래서 찬란한 신화를 얻었다.

     

    전혜린은 일부 파독 광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뮌헨 슈바빙(Schwabing) 거리와 독일 경험을 모아 발간한 그녀의 유고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이다. 독일 사회에 대한 교양서적이 많지 않던 시대였기에 상당수 파독 광부가 전혜린의 이 책을 읽고 독일에 왔다. 홍종철의 얘기다.

     

    “나중에 대통령 훈장까지 받은 파독 광부 고창선이라는 친구는 전혜린의 책을 읽고 독일에 왔다. 서독에 간다고 하니까 독일에 관련된 책을 찾았지만 거의 없었다. 그녀의 책을 본 것이다. 나중에 방에 촛불을 켜놓고 전혜린이 느꼈던 독일 분위기를 느끼려 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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