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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8-7화) 독일 사회에 핀 ‘이미륵 신화’
  • 운영자
    조회 수: 511, 2015.09.05 20: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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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바다를 항해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그렇게 나는 영원한 원주민들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충족된 나날은 그 식탁 위에 와 있건만,

    나에겐 먼 곳이 형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릴케, 「외로운 남자」에서

     

    “좋은 인격과 부단한 노력으로 동양인의 긍지와 정서를 서구에 인식시켰고 한국민을 위해 문화사절 역할을 했다.”(최종고, 1983, 215쪽)

     

    최종고(1983)는 이미륵에 대해 “독일어 작품을 통해 한국 사상 및 문화를 서구에 소개”(213쪽)했다며 이같이 호평했다. 최종고의 호평처럼, 이미륵은 독일 사회에서 하나의 ‘신화(神話)’였다. 비록 1920년 독일에 들어와 1950년 3월20일 타계하기까지 30년 밖에 독일에서 살지 않았지만, 독일에서 남긴 족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정규화와 전혜린의 연구(전혜린, 2002; 정규화, 2001; 정규화, 2012; 정규화·박균, 2010 등 참조)와 송준근의 증언 등을 종합하면, 이미륵은 1899년 3월8일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이동빈과 어머니 이성녀 사이의 1남 3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의경. 미륵(彌勒)은 아명으로, 어머니가 38세의 나이에 미륵보살을 찾아 100일 기도를 드린 끝에 얻은 아들이라 하여 미륵이라 불렀다.

     

    이미륵은 해주보통학교(4년제)를 졸업하던 해인 1910년 당시의 관례대로 6세나 연상인 17세의 최문호와 결혼한다. 이미륵과 최문호 사이에 1917년 장남 명기와 1919년 딸 명주가 차례로 태어났다. 2006년 현재 이들의 생사는 알려지지 않는 상태다.

     

    강의록 등으로 독학해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이미륵은 3학년이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다. 동료 대학생과 독립을 호소하는 유인물을 뿌렸다. 그는 이 때문에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게 돼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상해에서 9개월여 체류하면서 임시정부 일도 하기도 했다.

     

    이미륵은 다시 유럽으로 떠났다. 배를 타고 싱가포르 해협과 인도양을 거쳐 40여일 만에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도착했다. 베네딕트회 전도사인 빌헬름을 만나 독일의 뮌스터시의 슈바르작(Schwarzach)수도원에 들어갔다. 1920년 5월26일이다. 그는 이곳에서 8개월간 머물며 독일어를 공부했다. 이 때 베네딕트회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베네딕트회(Ordo Sancti Benedicti)는 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성 베네딕토(480-547)가 창립한 수도회다. 청빈과 순결, 복종의 이상에 따라 엄격한 규율을 통해 중세 수도회의 모범이 됐다. 집단적 예배를 강조해 하루에 일곱 번씩 수사들이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는 성무일과를 강조했다.

     

    이미륵은 뷔르츠부르크,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1925년 뮌헨대로 옮기게 된다. ‘뮌헨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전에 의학을 공부했던 그는 뮌헨대에서 동물학과 철학으로 방향을 바꿨다. 이미륵은 철학으로 전과(轉科)한 배경에 대해선 “직업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게 더 절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미륵은 1926년 뮌헨대 외국인 학생회장으로 활동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1927년 6월25일부터 3개월간 늑막염으로 스위스 루가노 요양소에 입원하기도 했다. 1928년 7월18일 뮌헨대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미륵은 이때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1927년 2월5일부터 2월14일까지 벨기에 브뤼셀 등에서 열린 ‘세계 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독일 유학생이던 이극노와 파리에서 공부하던 김법린, 황우일 등과 함께 참석했다. 이미륵 등은 대회에서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 부당성과 침략당한 조선의 현실을 외국 대표들에게 알리기 위해 독일어와 영어 등으로 쓰인 8페이지짜리 문건 「조선의 문제」를 제작, 배포하기도 했다.

     

    이미륵은 박사학위를 받은 뒤부터 창작에 열중했다.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이야기」를 발표했다. 그의 유고(遺稿)는 대부분 이 시기의 산물이었다. 일부 독일인을 대상으로 서예도 가르쳤다.

     

    이미륵은 1931년 알프레드 자일러(Alfred Seyler·1880-1950) 교수의 뮌헨 집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31년 『다메(Dame)』지에 소설 「하늘의 천사」를 게재했다. 1932년 자일러 교수와 함께 뮌헨 교외인 그래펠핑으로 이사했다. 이미륵은 바이마르의 괴테 생가에서 담장이 덩굴을 가져와 자신의 침대 화분에 길렀다. 이 담장이 덩굴은 나중에 그의 묘소에 옮겨 심어지기도 했다.

     

    이미륵은 1943년 그래펠핑에서 문화인 단체 ‘월요문인회’를 조직했다. 정기적으로 문학발표회와 토론회를 가짐으로써 작가, 교수, 화가 등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1946년. 이미륵은 뮌헨의 피퍼(Piper)출판사를 통해 첫 소설 작품 『압록강은 흐른다』를 출간했다. 한국의 전통과 동양인의 정신세계를 자전적 이야기로 풀어간 소설이었다. 장롱 위의 꿀을 훔쳐 먹다 들켜 혼나고, 손톱에 봉숭아 꽃물들이던 기억, 쑥뜸의 공포와 잠자리채 이야기…. 마지막 장면은 절제돼 오히려 서글프다.

     

    “그리고 곧 철이 바뀌어 눈이 내렸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성벽에 흰 눈이 휘날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흰 눈에서 행복을 느꼈다. 이것은 우리 고향 마을과 송림만에 휘날리던 눈과 같았다. 이날 아침, 나는 먼 고향에서의 첫 소식을 받았다. 나의 맏누님의 편지였다. 지난 가을에 어머님이 며칠 동안 앓으시다가 갑자기 별세하셨다는 사연이었다.”(이미륵, 1946/2010, 254쪽)

     

    이미륵의 작품은 동양의 내면 풍경과 대면할 기회를 제공했다고 서독 문단으로부터 호평 받았다. 특히 과장되지 않으면서 잔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 문장이 오히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부터 뮌헨대 동양학부에서 한학과 한국문학을 강의하던 이미륵은 1950년 1월 위암이 악화돼 볼프라츠하우젠 병원에 입원했다. 수술을 받았지만 3월20일 51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이미륵과 관련된 인사나 조직도 적지 않다. 먼저 이미륵의 혈족(血族)으로는 누이의 아들인 이영래(현재 유족대표), 이학래 등이 있다. 현재 인천시 남동구 고잔동에는 정규화를 회장으로 한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도 있다. 이미륵의 제자(弟子)로는 볼프강 바흐(Wolfgang Leander Bauer) 중문학 교수가 있다. 그는 이미륵을 만나 동양철학에 심취, 중문학을 전공하게 됐다. 이미륵의 묘지에 적힌 한자 ‘이의경’을 쓰기도 했다. 작고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권터 데본(Gunther Debon) 교수도 이미륵에게서 한국과 한학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자일러 교수의 장남 오토 자일러(Otto Seyler)는 아직도 이미륵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고, 나치에 저항한 민속학자 쿠르트 후버(Kurt Huber, 1893-1943) 교수의 딸 브리기테 바이스(Brigitte Weiss)도 이미륵의 자필 사인이 담긴 독일어 초판본 『압록강은 흐른다』를 소장 중이다.

     

    이미륵은 문학적 성취뿐만 아니라 실천적 지성인(知性人)으로서도 독일 사회에 알려졌다. 특히 히틀러와 나치, 파시즘에 반대하면서도 정직성을 잃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다음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나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 이미륵은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 나오는 반나치 저항운동 ‘백장미 사건’의 뮌헨대 쿠르트 후버 교수와도 깊은 교분을 맺었다. 후버 교수는 반나치 단체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이미륵은 후버 교수가 반나치 운동으로 체포된 뒤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염려하기도 했다. 송준근의 얘기다.

     

    “후버 교수의 딸에 의하면, 후버 교수가 반나치 운동 혐의로 체포된 뒤 가족 외에는 아무도 그의 면회(面會)를 오지 않았다. 친척도 무서워 후버 교수의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륵만은 집에 자주 찾아와 ‘어려운 일이 없느냐’며 따뜻하게 보살펴줬다. 이미륵은 초청받은 집에서 얻은 음식을 가져와 후버 교수의 아내 클라라 후버(Clara Huber·1908-1998)에게 전하며 후버 교수에게 넣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후버 교수의 딸은 회고했다.”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번역한 전혜린도 이즈음 나치에 동조하지 않고 저항하던 지성인 이미륵에 관한 일화(逸話) 하나를 기록했다. 전혜린(2002, 113쪽 참조)에 따르면, 나치가 한참 득세하고 있던 때 이미륵이 스웨덴으로 여행을 갔다. 같은 기차에 탄 어떤 독일 젊은이가 이미륵을 붙들고 맹렬히 히틀러 찬양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묵묵히 다 듣고 앉았던 이미륵이 얘기가 끝나자 물었다.

     

    “히틀러가 누구입니까?”

     

    이 물음에 그 독일 사람은 이미륵을 마치 무슨 신기한 동물을 보듯이 물끄러미 바라본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니 지도자 히틀러를 모르신단 말입니까? 그 분의 위업은…”

     

    독일인은 약 반시간 동안 히틀러가 해온 ‘위업(偉業)’에 대해 웅변을 토했다. 그런 뒤에 독일인은 다시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히틀러 이름도 모르다니!”

     

    이미륵은 서슴지 않고 당당하게 답했다.

     

    “독일에서 왔습니다.”

     

    이미륵의 이 대답에 독일인은 죽음과 같은 침묵(沈黙)에 빠졌다고 전혜린은 전했다. 정규화는 이 이야기의 배경이 1936년 코펜하겐으로 가는 배위였다고 기록한다(정규화, 2001, 389쪽 참조).

     

    이미륵은 실천적 지성인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정직성(正直性)으로도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서독에서 화폐개혁이 이뤄지기 전인 1948년. 이미륵은 목사에게 50마르크를 줬다. 얼마 후 화폐개혁이 이뤄지면서 목사에게 준 50마르크는 사실상 휴지가 됐다. 이미륵은 이에 새 화폐로 돈을 바꾼 뒤 목사에게 50마르크에 해당하는 돈을 다시 전달했다. 목사는 이미륵의 정직성에 감복했다. 얘기는 목사의 친척 등을 통해 독일 언론에 알려지게 됐고, 경제 부흥을 위해 국민 마음을 모으는데 열을 올렸던 독일 언론에 의해 대서특필(大書特筆)됐다고 송준근은 전했다.

     

    이미륵이 작고한 지 4일이 지난 1950년 3월24일. 독일인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그래펠핑 공동묘지에서 이미륵의 장례식이 열렸다. 이미륵이 생전에 가끔 불렀던 애국가가 불려졌다. 이미륵을 존경했기에 독일 사람이 부른 것이다. 실천적 지성인 이미륵의 힘이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아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참고 자료>

    <Der Yalu Fliesst / 압록강은 흐른다>(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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