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메뉴 건너뛰기

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9-1화) 지하 1000m의 첫 희생자
  • 운영자
    조회 수: 202, 2015.09.05 20:50:05
  • 김철환-동아일보 19641127-3면.jpg

    <파독 광부 김철환의 사망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64년 11월27일자 3면>

     

    1964년 11월25일 오전 11시30분 서독 겔젠키르헨에 위치한 에센광산의 훈서프리스지구 지하. 석탄층을 파고드는 호벨의 굉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연결된 석탄층의 한 곳에서 갑자기 커다란 석탄 덩어리가 무너져내렸다. 석탄 덩어리는 스템펠 작업을 하던 한 광산 노동자의 머리를 덮쳤다.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뒤이어 천장에서 무수한 석탄이 부서져 내렸다. 순식간에 석탄 더미는 사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쌓여버렸다.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다.

     

    사고(事故)였다. 곧바로 구조작업이 이뤄졌지만, 쓰러진 사람은 이미 차가운 주검으로 변한 뒤였다. 지하 1000m의 지하에서 죽음은 삶에 너무나 가까이 있었다. 사망자는 충남 서천 출신의 한국인 파독광부 1차2진 김철환(당시 32세)이었다. 첫 한국인 파독광부 희생자(犧牲者)였다.

     

    파독 광부들은 1960, 70년대 한국 경제성장의 디딤돌을 놓았지만, 이를 위해 수많은 이들이 지하 1000m에서 이름 없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역만리 지하에서 숨져갔던 이들 파독 광부야말로 ‘한강의 기적’을 낳게 한 진정한 ‘경제 유공자’인 셈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한국 현대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역사에서 그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이름이자 영혼(靈魂)’이었다.

    김철환의 유해는 현지에서 화장 처리된 뒤 고국으로 돌아왔다. 사고 소식은 삽시간에 파독 광부 사회에 전파됐다.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고, 최재천은 기록했다.

     

    “지난 11월25일 오전 11시30분. ‘보다 나은 임금과 보다 높은 기술’을 목표로 이곳 루르의 탄광까지 와 일하던 우리 광부들은 한 사람의 성실한 동료를 잃고 벅찬 슬픔과 그럴수록 새삼스러워지는 고향에의 향수에 잠시 일손을 쉬었다.”(최재천, 1964.12.13, 6면)

     

    ‘첫 번째 희생자’ 김철환의 유해는 나중에 충남 서천이 아니라 서산으로 잘못 배달돼 논란이 되기도 했다. 즉 그의 유해는 1964년 12월19일 충남 서천이 아닌 서산우체국으로 잘못 배달됐고, 유해 상자에서 유골의 재가 흘러나오는 등 부실하게 관리 운반됐다는 것이다.

     

    “우체국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서독에서 서울국제우체국을 거쳐 충남 서천으로 가는 도중 착오로 서산으로 온 것이라고 한다. 종이끈으로 허술하게 묶여진 유골 상자에서는 유골의 재가 줄줄 흘러나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경향신문』, 1964.12.21, 7면)

     

    김철환의 유해가 제대로 관리 전달되지 못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국내 광산노조가 이에 항의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동아일보』, 1964.12.23, 3면 참조).

     

    1964년 11월30일 월요일. 또 다른 한국인 젊은이가 본(Bonn)에서 남쪽으로 100km쯤 떨어진 아헨의 에슈바일러광산(EBV) 산하 굴라이광업소의 캄캄한 지하 막장에서 죽었다. 충남 대천 출신의 미혼인 이성재였다. 두 번째 희생자였다. 단국대 재학 중 군에 입대한 이성재는 제대 후 예상되는 취업난을 고려해 1964년 10월 파독한 경우였다(『경향신문』, 1965.1.26, 3면 참조).

     

    성실하고 비교적 근무성적도 우수했던 수평갱 채탄부 이성재는 사고 당일도 평소처럼 탄을 캐내고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기분 나쁜 저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등 뒤에서 커다란 석탄 바위가 그를 덮쳤다. 얼마 후 동료 광부들은 한 무더기의 석탄 더미를 파내고 그를 찾아냈다. 하지만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뒤였다.

     

    파독 광부 출신임을 밝히고 그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앞장서고 있는 귄이종은 이성재의 사고 소식을 듣던 당시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성재의 죽음은 그를 포함해 한국인 광부들에게 큰 충격을 줬기 때문이다.

     

    권이종(2004, 62-63쪽)의 기억에 따르면, 이성재는 지하 채탄일을 시작한지 채 몇 주도 지나지 않는 때에 목숨을 일었다. 독일 광산의 환경에 제대로 익숙하지 못한 상태였다.

     

    “큰일 났어, 큰일 났다니까. 천장이 무너져 사람이 깔렸대.”

    “누구야? 누구래? 죽었어, 살았어?”

    “이씨라는구만. 돌덩이를 파헤치고 겨우 구출은 했다는데, 목숨이 온전하겠어?”

    “온 지 며칠 됐다고, 쯧쯧, 거 참 안됐구만. 그런데 그 사람 처자식은 있나?”

     

    광산에서 빈발하는 매몰 사고였지만, 파독 광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파독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다 멀리 한국에서 함께 온 동료가 변(變)을 당한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재의 시체가 운구차에 실릴 때 장례식장은 눈물바다로 변했고, 많은 파독 광부들은 넋을 잃고 여러 날을 눈물로 지새웠다. 파독 광부들은 이성재 사건으로 비로소 죽음이 자신들의 곁에 어슬렁거리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도망갈 수도 없다. 나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청운의 꿈을 안고 왔으니 끝까지 버틸 수밖에. 동료들의 비탄을 뒤로 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나 역시 언제 저렇게 관 속에서 말 못하는 시체로 누워 있을지 두려웠다.”(권이종, 2004, 63쪽)

     

    새 희망을 찾아 이역만리 독일의 지하로 뛰어온 삶. 하지만 뜻하지 않게 찾아온 죽음이라는 실재(實在). 그들은 자신의 운명이 불안했다. 자신의 존재가 안타까웠고, 자신의 처지가 서러웠다.

     

    우리들 생존자들

    아직도 불안의 구더기들이 우리를 갉아먹는다.

    -넬리 삭스, 「우리들 생존자들」에서

     

댓글 0 ...

위지윅 사용
번호
제목
닉네임
78 운영자 165 2016.01.10
77 운영자 221 2016.01.09
76 운영자 153 2016.01.09
75 운영자 137 2016.01.09
74 운영자 204 2015.09.05
73 운영자 429 2015.09.05
72 운영자 340 2015.09.05
71 운영자 375 2015.09.05
70 운영자 248 2015.09.05
69 운영자 461 2015.09.05
68 운영자 282 2015.09.05
67 운영자 229 2015.09.05
66 운영자 457 2015.09.05
65 운영자 227 2015.09.05
64 운영자 316 2015.09.05
운영자 202 2015.09.05
62 운영자 511 2015.09.05
61 운영자 496 2015.09.05
60 운영자 273 2015.09.05
59 운영자 272 2015.09.05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