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메뉴 건너뛰기

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9-2화) 계속 되는 광부들의 희생
  • 운영자
    조회 수: 316, 2015.09.05 20:59:21
  • 최대혁-경향신문 19650126-3면.jpg

    <파독 광부 최대혁의 사망을 전한 경향신문 1965년 1월26일자 3면>

     

    지하 1000m에서 한국인 파독 광부의 희생은 계속 됐다. 1965년 4월26일 오전 8시30분 에센의 에슈바일러광산(EBV) 지하갱내. 저탄(貯炭)작업 중이던 최대혁(崔大爀·당시 33세)은 탄차와 탄차 사이에 끼이면서 두개골파열로 숨졌다. 파독 광부 3번째 사망자였다. 경북 영주군 풍기(豊基)가 고향인 최대혁은 1964년 10월 파독해 이곳에서 일해왔다(『경향신문』, 1965.4.29, 3면; 『동아일보』, 1965.4.29, 7면 참조). 당시 신문이 전하는 최대혁과 그의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이다.

     

    “최씨집 외아들로 기둥이자 주춧돌인 최대혁의 본가에는 부모와 세 여동생, 처, 장남, 네 딸 등 11명의 가족이 방 2개짜리 판잣집에서 오직 소백(小白)준령의 화전 2000평으로 연명해가고 있다. (영주) 풍기 바닥에서 ‘최 효자’로 통하던 최대혁은 품팔이를 해가며 주경야독으로 풍기중·고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가난으로 작년 10월10일 돈을 벌어 가정도 일으키고 원하던 공부도 해보려고 여비 5만원을 빚내 파독 광부로 갔다. 그 동안 매달 1, 2번씩 꼬박꼬박 편지를 보냈고 지난 1월 하순엔 현금 5만원을 송금해 빚을 대충 정리했다. 여동생 결혼비(결혼식 5월10일)조로 친구로부터 돈 7만 8543원을 빚내 지난 29일 송금했지만, 부친은 ‘돈표’를 쥐고 찾을 경황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 최대혁이 떠날 때 임신 중이던 부인은 지난 3월10일 쌍둥이 여아를 낳았지만 남편 얼굴은 못본 채 비보를 먼저 받게 됐다.”(이정영, 1965.5.1, 7면)

     

    에슈바일러광산에 근무하던 동료 한국인 광부들은 숨진 최대혁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성금 218마르크(당시 1만4800원)을 모아 동아일보사에 기탁, 화제가 되기도 했다(『동아일보』, 1965. 8.12, 7면 참조).

     

    1966년 1월29일에는 파독 광부 권형식이 숨졌다. 그는 약 2주 전인 1월14일 지하 막장에서 나무 돌받이에 치여 간과 복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돌받이나무가 빠지면서 그의 복부를 친 것이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권형식은 끝내 숨지고 말았다. 장재림은 자신의 일기에서 권형식의 사고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금요일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토·일요일은 쉬기 때문에 홀가분하다. 권형식이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다. 그것도 인술로 감당하기 어려운 복부파열! 운명의 신은 가혹한가보다. 충진을 하자면 우선 나무로 돌받이를 만들어 그 위에 돌을 받고 아래에서 일한다. 그 돌받이나무가 빠지면서 권형식의 복부를 치고 말았다. 간이 파열됐다고 한다. 1월29일 새벽 1시2분. 그는 영원히 갔다. 주인 ‘한즈’ 영감은 친자식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고 있다.”(장재림, 1969.5, 346쪽)

     

    주독 한국대사관 등에 따르면, 1966년 10월까지 작업 도중 사망한 사람은 첫 희생자인 김철환을 포함해 7명에 달했다. 교통사고를 비롯한 기타 사건사고로 인한 사망자까지 포함하면 12명이나 됐다. 광부 파독이 이뤄진 지 겨우 3년만의 일이다. 한국인 광부들이 지하에서 잇따라 목숨을 잃게 되자, 파독 광부사회는 크게 동요했다. 1차4진이던 염천석은 당시 파독 광부들 사이에 짙게 드리운 불안의 그림자, 죽음의 그림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 곳에 온지 불과 2년이라는 세월이 접어들기도 전에 세 사람의 귀한 생명을 앗아갔다. 속출하는 무수한 중경상자를 눈으로 보고 듣고 게다가 자신이 언제인가 당할지도 모르는 기가 막히는 현실이고 보면 삶이 저주스럽기까지만 하다.”(염천석, 1966.4, 255쪽)

     

    1967년 10월4일 오후 6시. 1966년 파독했던 1차7진 임무호가 지하 작업 중 목숨을 잃었다. 임무호는 당시 독신이었다. 화장된 그의 유해는 10월말 그의 선배 손에 의해 고국으로 ‘서럽게’ 돌아왔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선연한 분리. 당시의 풍경이다.

     

    “우리는 짐을 부치고 체크 포인트를 빠져나와 대합실로 나가려는데 김 통역이 유해를 안고 쩔쩔매고 섰다. 지난 10월4일 오후 6시쯤 (1차)7진으로 온 임무호라는 동료가 작업사고로 사망했다. 그런데 그의 유골을 우리 비행기로 보내려고 나왔지만 아무도 그것을 맡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은 자의 설움! 어떤 자는 살아서 돌아가고 어떤 자는 죽어 돌아가다니. 가족들은 얼마나 통절할까. 나는 유골을 받아들고 대합실로 나왔다. 그곳에 모인 많은 시선이 내게로 집중된다. 더욱 가슴이 아프다. 두 사람, 한 사람은 산자요 또 한 사람은 죽은 자. 오후 4시 정각 전원 비행기에 탑승, 비행기는 은익(銀翼)을 태양에 번뜩이며 창공을 난다.”(장재림, 1969.5, 361쪽)

     

    1970년대 초. 파독 광부 정용화가 굴진 작업을 하다 돌에 맞아 숨졌다. 통역으로서 정용화와 함께 일했던 홍종철의 기억이다.

     

    “사무실에 있는데, 사고가 났다고 해 현장으로 달려갔다. 정용화가 석탄가루로 범벅이 된 작업복을 입은 채 단가로 실려 나오고 있었다. 그는 굴진 작업을 하다가 돌에 맞아 숨졌다. 그때가 아마 1970년대 초였다.”

     

    1980년대. 광부 파독은 이미 종료됐지만, 파독 광부의 희생은 계속 됐다. 그들이 파독 광부로 지하에서 일을 하는 한, 죽음은 언제나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 삶이 있는 한 죽음은 결코 지치는 법이 없었다.

     

    1980년 11월 오전 4시쯤, 캄프린트포트의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광산 지하. 공이작업을 하던 문경호가 밤 근무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기 위해 선로에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유고인이 운전하는 트랜스포터(수송 차량)가 쏜살같이 문경호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하에는 안개가 자욱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희미하기만 했다. 트랜스포터는 기둥 옆에 서서 기다리던 문경호를 보지 못했고, 트랜스포터에 삐딱하기 실린 짐은 그대로 문경호를 치며 지나갔다. 문경호는 움푹 파인 구덩이로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그는 현장에서 숨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김일선의 증언이다.

     

    “문경호가 구덩이에 쑥 들어가 쓰러져 있었다. 한국인 노동자 3명이 들어가 문경호의 시신을 들어 올렸다. 피냄새가 진동했다. 샤크트가 멈췄다. 작업장은 발칵 뒤집혔다. 나는 문경호의 모습이 떠올라 며칠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파독 광부의 증언 등을 종합하면, 1977년 파독한 2차40진 문경호는 퇴직금을 타 돌아갈 요량이었다. 비행기 티켓까지 예약하는 등 귀국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미장원을 하던 애인도 독일로 초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경호는 귀국을 얼마 앞두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됐다. 그의 유골만이 조국으로 돌아왔다.

     

    주독 한국대사관 등에 따르면, 1963년부터 1982년까지 독일 현지에서 광산 노동 도중 숨진 한국인 광부는 26명에 이르렀다. 이는 파독 광부 사망자(死亡者) 78명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이었다. 교통사고(21명), 질병(17명), 익사(2명), 자살(4명), 사인불명(8명) 등이 그 뒤를 이었다.

     

    1989년 9월23일 토요일. 이날은 캄프린트포트의 프리드리히 하인리히광산 지하막장에서 한국인 파독 광부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날이다. 2차44진 최도현이었다. 최도현은 이날 오후 4시 기계를 이용, 화차에 탄을 싣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탄이 넘치면서 그를 덮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최도현은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탄이 그 위로 무수히 쏟아져 내렸다. 김일선의 증언이다.

     

    “한민족체전을 하루 앞둔 날, 프랑크푸르트에 내려 왔다가 캄프린트포트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시내에 도착했을 저녁때쯤 (파독 광부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집에도 들르지 못하고 곧바로 사고 현장으로 갔다. 안원제 등과 함께 광산회사에 들어갔다. 다른 사람이 작업을 멈췄다. 탄을 파헤쳐보니 최도현이 탄에 깔려 숨져 있었다.”

     

    1944년생인 최도현은 1977년 6월 2차44진으로 파독, 캄프린트포트의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80년 광부근무를 연장한 뒤 1988년쯤 노이켈켄으로 이사를 갔다. 그는 한국에 있던 부인을 초청, 2남 1녀의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캄프린트포트 전 한인회장이던 파독광부 2차47진 강선기는 사고가 나자 간이음식점을 운영하던 최도현의 아내를 찾아갔다. 강선기는 일단 놀라지 말라고 부인을 진정시킨 뒤 사고 경위를 설명하며 병원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강선기의 기억이다.

     

    “한밤중에 노이켈켄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노이켈켄 사장은 최도현 부인에게 놀라지 않게 얘기해달라고 부탁했다. 차를 타고 간이음식점에서 일하던 최도현의 아내를 만나러 갔다. 나는 ‘최형에게 약간 사고가 났다, 문 닫고 잠깐 가자’고 말했다. 나는 놀라지 말라고 하면서 차분히 얘기를 풀어나갔다. 참으로 가슴 아픈 풍경이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와 역사는 독일 지하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파독 광부들을 제대로 기억(記憶)하지 못하고 있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고, 그들의 죽음을 제대로 기억하거나 평가하고 있지도 못하고 있다. 지하에서 죽어간 그들 파독 광부들은 물리적인 죽음에 이어 그들의 죽음이 주위 사람들과 사회, 역사에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면서 ‘역사적인 죽음’도 피하지 못하고 있다. 

     

댓글 0 ...

위지윅 사용
번호
제목
닉네임
78 운영자 165 2016.01.10
77 운영자 221 2016.01.09
76 운영자 153 2016.01.09
75 운영자 137 2016.01.09
74 운영자 204 2015.09.05
73 운영자 429 2015.09.05
72 운영자 340 2015.09.05
71 운영자 375 2015.09.05
70 운영자 248 2015.09.05
69 운영자 461 2015.09.05
68 운영자 282 2015.09.05
67 운영자 229 2015.09.05
66 운영자 457 2015.09.05
65 운영자 227 2015.09.05
운영자 316 2015.09.05
63 운영자 202 2015.09.05
62 운영자 511 2015.09.05
61 운영자 496 2015.09.05
60 운영자 273 2015.09.05
59 운영자 272 2015.09.05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