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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9-4화) 가정 파탄도 적지 않아
  • 운영자
    조회 수: 463, 2015.09.05 21:53:10
  • 아내 신모-동아일보19820622-11면.jpg

    <파독 광부 아내 신모씨의 사연을 전한 동아일보 1982년 6월22일자 11면>

     

    “신씨는 파독 광부의 아내였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도 있다. 그녀의 탈선은 많은 가정주부들이 파탄의 비극으로 빠지는 첫 문턱인 카바레였다. 1981년 7월 신씨는 서울 동대문 K관광카바레에서 범인 이모씨를 만났다. 오랜 남편과의 떨어짐에서 외롭던 신씨는 곧 욕정의 노예가 됐다…서울 미아동 M여관을 무대로 밤낮없이 밀회를 거듭하던 이들은 아예 방을 얻어 동거까지 했다.”(이석구, 1982.6.21, 11면)

     

    1977년 광부로 서독으로 떠난 남편의 오랜 부재(不在)가 계기가 돼 가정을 버리고 일탈(逸脫)의 길로 들어섰다가 파멸한 어느 여성의 이야기가 실린 신문 기사다. 그녀는 1982년 6월 M16소총으로 은행 등을 털려고 모의하다가 발각된 뒤 범인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일부 파독 광부는 가정이 파탄되는 아픔을 겪었다. 즉 가장의 장기 외유에 따른 구성원의 일탈로 가정이 무너졌던 것이다. 신문에 소개된 파독 광부의 아내 이야기는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언론 보도(민병욱, 1982.6.22, 11면; 이석구, 1982.6.21, 11면 등 참조) 등에 따르면, 고향인 강원도 황지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신씨는 19세 때인 1968년 6월 가족의 중매로 결혼, 두 아이를 낳았다. 황지에서 일하던 남편이 1977년 4월 파독 광부로 떠나면서 그녀의 인생이 변하기 시작한다. 그녀도 처음에는 미장원에도 자주 가지 않고 옷도 특별히 꾸미지 않는 등 알뜰하게 생활하며 돈을 모으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술을 마시고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카바레까지 출입하면서 ‘카바레 제비족’으로 알려진 이씨를 만나 곧 욕정에 빠지고 만다. 신씨는 1982년 3월 서울 정릉동에 보증금 30만원 월세 4만원짜리 방을 얻어 이씨와 동거를 시작했다. 하지만 남편이 서독에서 보내준 돈 600만원을 유흥비로 모두 탕진하자 돈을 모으기 위해 이씨가 꾸미는 범행에 참여할 것을 결심했다. 신씨는 이씨와 M16강도를 모의했지만 범행이 이뤄지지 못하고 자신의 불륜 사실만 밝혀지자 자신의 일탈이 알려지는 게 두려웠다. 신씨는 이씨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요청하고, 결국 이씨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어지는 언론 보도 내용이다.

     

    “이씨가 M16소총을 구하기 1주일 전 그녀도 범행계획을 알고 스스로 가담하겠다고 제의했다. 탕진한 600만원을 강도질로 되찾겠다는 생각이었다. 이씨의 동생이 ‘총을 가지러 부대 주위로 오라’고 연락했을 때는 백금반지를 전당포에 저당 잡혀 콜택시 비용 4만원을 대주기까지 했다. 최근 남편이 휴가차 귀국하자 신씨는 이씨와 동거하던 집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낮에는 이씨를 계속 만났고 밤에만 집에 들어가는 형편이었다…1982년 6월18일 부산역 앞 여관에서 방 2개를 얻어 잔 이들은 19일 아침 용두산 공원에서 자수할 것을 상의했다. 유부녀로 남편이 송금한 돈을 탕진하고 간통한 사실까지 세상에 알려진 신씨는 자수를 반대했다. 이들은 오후 자신들의 사진과 수배기사가 난 것을 보고 20일 오후 5시 서울 성북구청 앞 호수다방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져 상경했다. 이씨와 신씨는 19일 오후 7시 동침 장소로 자주 이용했던 서울 미아동 M여관 209호에 투숙했다. 신씨는 ‘남편이나 애들, 주위 사람들 앞에 도저히 나타날 수 없다. 나를 사랑한다면 죽여 달라’고 애원했다. 이씨가 극약이 없다고 하자 신씨는 원피스 허리띠를 풀어주며 목을 졸라 죽여줄 것을 간청했다. 이씨는 ‘신씨의 처지를 생각하면 죽는 게 더 좋을 것으로 판단, 그 동안 지은 죄를 속죄하는 뜻으로 그녀의 목을 졸라 죽였다’고 경찰에서 말했다.”(이석구, 1982.6.21, 11면)

     

    한국에 있던 아내의 일탈만을 탓할 게 아니었다. 파독 광부의 장기 부재가 아내의 그런 일탈을 촉발한 측면도 없지 않아서다. 그래서 파독 광부들은 가정 해체(解體)의 두려움으로 고통을 받기도 했다.

     

    “가정 파탄의 사례가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고 기사가 다시 해외 취업자에게 알려지게 되자 현지의 취업 노동자들은 자기 가정을 더욱 걱정하게 됐다. 가정파탄의 기미가 있다고 느끼고 현지에서 말썽을 부리거나 자해행위를 한 사례도 있으며 서둘러 귀국한 경우도 있었다.”(박래영, 1988, 568쪽)

     

    피땀 흘려 모아 조국에 송금된 돈이 사기(詐欺) 사건 등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친인척의 주머니에 들어가 속절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송금이 매형의 실패한 사업자금으로 탕진된 경우다.

     

    “그 역시 굴진을 해야겠다고 한다. 그는 5항 굴진으로 왔는데 돈 때문에 채탄을 하다가 다리가 부러졌다. 위험이 덜한 충진으로 4개월 동안 아무 탈 없이 지냈는데 다시 굴진을 원하는 것을 보면 돈이 원수만 같다. 돈! 그러나 그가 그토록 절약하여 송금한 5, 60만원이란 거액을 매형이라는 작자가 사업실패로 모조리 탕진했다니 피눈물 나는 이야기다.”(장재림, 1969.5, 328-356쪽)

     

    1960, 70년대 한국의 급격한 물가상승 등의 영향으로 상대적으로 실질 임금이 하락, ‘보이지 않는 손해’를 보기도 했다. 상당수 광산 노동자들이 돈을 모아 국내에 집을 사려고 했지만, 빠르게 오르는 물가와 부동산 투기열풍으로 인해 오히려 임금 하락의 고통을 겪기도 했다.

     

    ‘한강의 기적’의 디딤돌이 됐던 광부 파독과 그들이 보내온 피땀 어린 송금은 이처럼 파독 광부의 목숨과 가정, 돈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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