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메뉴 건너뛰기

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9-5화) 눈물로 피워낸 ‘Lotus-Blume(연꽃)’
  • 운영자
    조회 수: 229, 2015.09.05 21:57:05
  • 04.jpg

    <진달래 기자 제공>

     

    연꽃은 피어 작열하듯 빛나며

    말없이 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향내음 풍기며 사랑의 눈물 흘리고

    사랑의 슬픔 때문에 하르르 떤다.

    -하이네, 「연꽃」 중에서

     

    ‘Lotus-Blume(연꽃)’ ‘백의(白衣)의 천사’ ‘동양에서 온 미소’…. 많은 독일 시민들은 파독 간호사의 기술과 헌신을 이같이 부르며 격찬(激讚)했다. 특히 한국 간호사에 대한 호평은 환자를 중심으로 입에서 입으로 퍼졌다. 한국인 파독 간호사들은 독일 등 유럽 전역에서 선명한 인상(印象)을 남겼다(이수길, 1997, 328쪽 참조).

     

    1980년대까지 상당수 유럽인이 한국이라고 하면 ‘한국 간호사’를 연상할 정도로, 파독 간호사들은 독일과 유럽 사회에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1988년 서울올림픽 직전 독일과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현지 유럽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한국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간호사를 연상한다’는 응답이 무려 11%나 됐을 정도다(구기성, 1992, 643쪽 참조).

     

    물론 이 같은 호평은 그냥 생긴 게 아니었다. 많은 파독 간호사들의 땀과 눈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실제로 일부 파독 간호사는 정신병을 앓거나 심지어 자살(自殺)을 시도하거나 자살한 경우도 있었다.

     

    1966년 12월25일 독일 베를린 노이쾰른(Neukolln)병원의 식당. 간호원장과 부원장 및 20여명이 모인 가운데 한국 파독 간호사를 위해 조촐한 파티가 준비되고 있었다. 그런데 미혼의 파독 간호사 박모씨가 보이지 않았다. 동료 간호사가 그녀를 찾아 나섰다. 박씨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사람을 불렀다.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박씨가 침대 위에 쓰러져 있었다.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다행히 일찍 발견돼 위를 세척,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박씨는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몇 달 후 우울증이 더 심해진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김진향, 2002.3.4, 10면; 2002.3.18, 18면; 2002.3.25, 10면; 2002.4.1, 18면 등 참조).

     

    1972년에만 한국인 간호사가 3명이 자살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2명은 서독 남성과의 실연의 충격으로, 나머지 한 명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에 지쳐 자살했다는 것이다. 언론보도의 일부다.

     

    “연초 휴가가 끝나고도 병원에 일하러 나오지 않는데 의아심을 품고 숙소로 찾아간 병원 직원은 방에서 한국 간호사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외로움에 지친 자살이었다. 1972년 정초 서베를린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밖에도 2명의 한국인 간호사 처녀가 서독 청년과의 사랑이 허사로 돌아간 것을 비관, 자살했다.”(정준-고학용, 1974.6.13, 4면)

     

    일부 파독 간호사는 정신질환을 앓았다. 1972년 한 독일인 의사는 “최소 10명 이상의 한국인 파독 간호사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남정호, 1972.1.23, 5면).

     

    다른 일부는 힘든 업무로 인해 건강을 잃기도 했다. 파독 광부 정택중(1997, 232쪽)은 자작시 「마누라를 요양소에 남겨 두고」에서 아내가 파독 간호사 생활 15년 만에 건강을 잃었다고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이름뿐인 백의천사 독일 환자 똥바라지

    간호사 생활 15년 만에 보석 같은 몸이 망가져

    요양소로 떠나고 나니

    귀에 들리는 것마다 모든 것이 공허하고

    눈에 보이는 것 모두 다 쓸쓸하고

    머리에 떠오르는 것 태산 같은 근심 걱정

    가슴 속에 오직 그리움뿐이로다

     

    때로는 잘못된 소문으로 고생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파독 간호사들이 고국에 송금하기 위해 병원 근무 후에 몸을 판다는 소문. 국내에선 ‘파독 간호사와는 결혼하지 마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다. 김정숙의 회고다.

     

    “고국에 있는 동생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내용은, 독일에 있던 한국 간호사는 한국에서는 결혼하기 어려우니 누나는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독일에 있는 간호사들이 고국으로 더 많은 돈을 송금하기 위해 오전 병원 근무가 끝나면 오후에는 몸을 팔아 돈을 번다는 소식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전파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헛소문이 어떻게 방영이 될 수 있는지 기가 막힐 일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30년을 살면서도 아직 그런 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독일 계약기간 3년 근무를 마치고 스위스 취리히로 갔다. 본심은 한국으로 돌아가 독일에 있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고, 스위스에 갔다 온 것처럼 행동해 좋은 곳으로 시집가야겠다는 계산이었다.”(김정숙, 2002.11.18, 22면)

     

    결혼한 파독 간호사들도 장기 부재에 따라 가족 해체 등을 겪기도 했다. 꼬박꼬박 송금했던 돈은 사라지고, 남편은 이미 바람난 경우도 있었다.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다시 독일로 건너온 한 간호사의 얘기다.

     

    “독일 뮌헨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50대 중반의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1970년대 초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 생계가 어려워지자 남편과 어린 남매를 한국에 남겨두고 독일에 와 간호사로 취업했다. ‘3년만 고생하면 우리도 남 못지않게 살겠지’하는 신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 받은 월급은 꼬박꼬박 한국에 있는 남편에게 송금했다. 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그녀는 희망을 안고 귀국했다. 한국에 도착한 그녀에게는 3년 동안 부쩍 자란 아이들과 바람난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쁨도 만나는 순간 그때뿐이었다. 남편은 그녀가 없는 사이 다른 여자를 사귀고 송금한 돈도 온데간데없이 다 쓰고 말았다. 더구나 직업도 없이 실업자로 있던 남편은 술을 자주 마시고 그녀를 구타하는 등 부부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그녀의 꿈이 이렇게 무너질 줄이야.”(김홍현, 2005, 233-234쪽)

     

    1966년 말 경찰 수사로 밝혀진 ‘한국난민구제회’ 사건도 슬픔을 안겼다. 파독 과정의 경비조달과 사용 등이 파독 간호사들의 입장에서 투명하고 공정하게 처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이종수 박사를 통해 파독한 계약기간 3년의 간호요원들은 서울 강남에 200병동 규모의 ‘난민구제병원’을 건립한다는 취지로 월급 가운데 일정 금액이 의무적으로 공제됐다. 하지만 한국난민구제회 관계자들이 파독 간호요원의 돈을 빼돌리는 등 불법 행위가 드러나면서 경찰 수사로 관계자들이 구속됐고 난민구제병원 사업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댓글 0 ...

위지윅 사용
번호
제목
닉네임
78 운영자 165 2016.01.10
77 운영자 221 2016.01.09
76 운영자 153 2016.01.09
75 운영자 137 2016.01.09
74 운영자 204 2015.09.05
73 운영자 429 2015.09.05
72 운영자 340 2015.09.05
71 운영자 375 2015.09.05
70 운영자 248 2015.09.05
69 운영자 461 2015.09.05
68 운영자 282 2015.09.05
운영자 229 2015.09.05
66 운영자 457 2015.09.05
65 운영자 227 2015.09.05
64 운영자 316 2015.09.05
63 운영자 202 2015.09.05
62 운영자 511 2015.09.05
61 운영자 496 2015.09.05
60 운영자 273 2015.09.05
59 운영자 272 2015.09.05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