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메뉴 건너뛰기

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2-4화) 노동력과 ‘종자돈’의 교환
  • 운영자
    조회 수: 115, 2015.06.24 16:56:18
  •  

    19611113-1.jpg

    <1961년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가진 박정희 대통령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간의 정상회담 장면-국가기록원>

     

    박정희 정권의 입장에서 서독의 차관은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지도 못했던 대규모 광부 파독까지 약속해야 할 만큼 중요했던 것일까. 그리고 광부 파독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1961년 5월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정치 장교’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전복된 지 겨우 1년이 지난 때다. 미국 등 서방진영은 박 소장의 쿠데타에 반대했다. 5․16쿠데타 직전 파키스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자칫 아시아에서 쿠데타가 도미노처럼 확산될 우려도 있었다.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자국 내 악화되는 경제상황과 쿠데타에 대한 불만 등으로 대한(對韓) 경제 원조를 중단하고 대신 차관 형식으로 바꿨다. 열악한 경제 상황에서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가 차관으로 바뀐 건 원조에만 의존해오던 한국 경제에는 ‘치명타’였다. 박정희 정권은 국내외 사정으로 인해 자본(資本)이 절실히 필요했다.

     

    1960년대 한국 경제는 대단히 열악했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https://ecos.bok.or.kr/) 자료에 따르면, 1960년 우리나라 총인구는 2501만 명이었고, 명목 국내총생산(GDP)과 명목 국민총소득(GNI)은 나란히 20억 달러에 불과했다. 1인당 명목 국민소득(GNI)은 80달러 수준. 산업 구조도 농림어업이 39%로 매우 높은 반면 광공업은 14.5%, 전기가스수도업과 건설업은 각각 0.6%와 3.3%, 서비스업은 42.6%로 농업사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노동소득 분배율(38.4%)과 저축률(8.1%), 국내 투자율(9.7%)도 저조했다. 도로의 총연장은 2만 7169km였고, 도로포장율도 3.7%에 그쳤다. 자동차 보유대수는 3만대 수준. 화폐 발행액과 광의의 통화량(M2)도 각각 146억원과 249억원에 불과했다. 수출액은 3280만 달러인 반면 수입액은 3억 4350만 달러로, 수출입의 대(對) GNI 비율은 15.4%에 그쳤다. 외환보유액도 1억 5700만 달러에 불과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1년 11월13일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 중단을 풀기 위해 방미했다. 11월14일에는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했지만, 돌아온 것은 냉대뿐이었다. 박 정권은 다급해졌다. 자칫 한국 경제의 붕괴로 이어져 정권의 존립 자체도 위기가 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본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정권의 성패를 갈리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급격히 감소하던 미국 대한원조를 대체할 수 있는 ‘돈’이 필요했다. 재미 언론인 문명자의 지적이다.

     

    “박정희는 자신들이 수립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행할 자금 및 공화당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급속히 감소하던 미국의 원조를 대체할 자금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문명자, 1999, 213-214쪽)

     

    하지만 불안한 국내 정치와 열악한 경제 상황, 더구나 쿠데타로 집권한 박 정권에 반대하는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한국에 돈을 빌려줄 나라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부각된 나라가 바로 서독이었다. 서독은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였다. 백영훈의 설명이다.

     

    “우리가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선진국은 서독뿐이었다. 서독은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한 국가였다. 동서로 분단된 나라였기에 한국의 사정을 어느 나라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처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박 정권은 육군소장 출신인 정래혁 상공부장관을 단장 겸 특명전권대사로 해 한국경제사절단을 구성, 자신의 친서를 들고 독일에 급파시켰다. 여기에 백영훈과 우용회 국장을 비롯해 함인영 차관보와 백명원 한국은행 외환관리부장 등 7명이 가세했다. 독일의 유태계 상인 슐 아이젠버그도 동행했다. 한국경제사절단은 1961년 11월13일 서북항공기편으로 독일로 날아갔다.

     

    아울러 우리 정부는 광부 파독 자체가 갖는 긍정적인 효과도 주목했다. 즉 광부나 간호사 등 노동력을 해외에 보냄으로써 만연해 있던 실업을 줄이고 사회 안정을 이룩하는 한편, 해외에 파견된 인력이 보내는 외화 송금 등을 통해 경제개발 추진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9, 181-182쪽 참조).

     

댓글 0 ...

위지윅 사용
번호
제목
닉네임
8 운영자 358 2015.09.05
7 운영자 400 2015.09.05
6 운영자 265 2015.09.05
5 운영자 2973 2015.06.27
4 운영자 209 2015.06.27
운영자 115 2015.06.24
2 운영자 293 2015.06.24
1 운영자 252 2015.06.24
태그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