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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2-5화) ‘오르도학파’의 우정
  • 운영자
    조회 수: 209, 2015.06.27 20:41:09
  • 19581024중앙산업에르하르트.JPG

     

    서독 정부와의 차관교섭도 쉽지 않았지만, 정작 어려운 것은 차관 교섭 테이블 자체를 마련하는 것이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서독과의 차관협상에서 최대 고비는 서독 경제의 ‘수장(首將)’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경제성장관을 비롯, 경제성 고위 당국자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에르하르트 장관은 한국의 경제사절단을 쉽게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신응균 주독 한국대사가 발 벗고 나섰지만 모두 허사였다.

     

    에르하르트 장관이 이끄는 서독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경제원조인 ‘마샬(Marshall)원조’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을 달갑지 않게 여기던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박 정권을 지원하기엔 부담스런 처지였다.

     

    한국의 경제사절단은 서독 경제정책을 틀어쥐고 있던 에르하르트 장관을 만나지 못하는 한 소득 없이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백영훈이었다. 먼저 서독 정부를 설득할 수 있는 한국 측 핵심 논리(論理)를 제공했다. 경제사절단을 이끌었던 정래혁 당시 상공부장관의 회고이다.

     

    “5․16이 난 해인 1961년 가을. 서독 정부의 공공차관을 교섭하기 위해 도독(渡獨)했다. 이때 본인의 주 보좌역은 백영훈 박사와 공업국장인 함인영 박사였다. 백 박사는 독일에서 경제를 공부한 분이니까 그곳 사정에 정통해 있었다. 독일 경제재건의 저력을 잘 알고 있었고, 경제성장을 위해 해외에 자본재를 수출해야 한다는 원리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정래혁, 2001, 276쪽)

     

    백영훈은 서독과의 협상 이론과 전략만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양국 정부 간 협상테이블을 마련하는 데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정부 간 협상이 이뤄지기 전 그는 매일 본(Bonn)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던 프리츠 포크트 교수의 집을 찾았다. 동독이 고향인 포크트 교수는 그의 뉘른베르크(Nurnberg)대 스승이었다. 그는 포크트 교수의 소매를 붙잡고 방독의 목적을 설명했다. 때론 포크트 교수의 부인을 붙잡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위해 서독으로 돈을 빌리러 왔습니다. 한국은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외환 보유고와 국민소득 등 모든 것이 열악합니다. 우리는 돈이 필요합니다. 교수님, 도와주십시오.”

     

    한국경제사절단은 이 사이 영국의 산업시설을 시찰하고,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거쳐 독일 기업을 시찰하고 있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었을까. 포크트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협상 창구는 에르하르트 경제성장관이 될 수 없고, 대신 루드거 폰 베스트릭 경제성차관으로 해 비공식적으로 만나라.”

     

    비공식적 협상이라는 점과 파트너가 경제성 최고 책임자인 에르하르트 장관이 아닌 차관이라는 점 등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지만, 당국자를 만날 수 있는 자체만으로도 일단 성공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었다. 정부 간 협상채널이 열렸기 때문이다.

     

    한국과 서독 간 차관교섭 회담이 시작된 것은 1961년 12월11일. 한국경제사절단이 한국을 떠난 지 거의 1개월이 다 돼가던 시기였다. 협상에는 한국 측 대표로 정 장관과 신응균 주독 한국대사 등 10명이 나섰고, 서독 측에서는 베스트릭 경제성차관과 브루노 태팬 외자협조처장, 프리츠 슈페펠트 외자협조처 차장 등 10명이 나섰다. 비공식 협상은 독일 연방경제성 차관의 응접실에서 열렸다. 베스트릭 차관은 능숙한 솜씨로 협상을 이끌었다. 베스트릭 차관과 한국 경제사절단과의 주요 대화 요지다.

     

    “돈(차관)을 빌려서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우리는 낙후된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독의 차관을 빌려 공장을 짓고 사업을 하려 합니다.”

     

    한국 경제사절단은 미리 준비했던 사업 계획서와 공장 리스트를 베스트릭 차관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한국이 서독 정부에 제시한 공장 및 사업은 △호남비료 나주공장 건설 △인천 한국기계공장 확장 △석탄공사 관산중장비 △인천제철 확장 △삼척 동양시멘트 공장 △중소기업 기계공장 지원 등이었다. 한국 경제사절단과 서독 정부 간 설명과 질문, 대답이 이어졌다. 한국 측은 한국 사람이 근면한 민족이며 한국은 동아시아의 민주주의 보루로서 잠재성이 있음을 강조했다(정래혁, 2001, 276-277쪽 참조).

     

    차관교섭의 최대 고비였던, 회담 이틀째인 12월12일. 한국 경제사절단과 에르하르트 경제성 장관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정 장관과 신 대사는 30여 분간 에르하르트 장관과 회담했다. 나중에 수상이 된 에르하르트 장관은 육중한 체격에 입엔 시가를 물고 협상단을 맞았다. 정 장관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설명하고 경제원조와 차관을 부탁했다. 에르하르트 장관은 건전한 장기계획에 대해선 원조를 할 것이라고 원칙적으로 답변했다. 이날 회동에서 비로소 차관 제공이 사실상 승인됐다.

     

    협상 3일째 되던 12월13일. 베스트릭 차관은 한국 경제사절단과의 협의에서 차관 규모를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서독은 한국이 요구하는 3억 마르크(약 6000만 달러)의 절반 수준인 1억 5000만 마르크(약 3750만 달러)를 제공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포크트 교수는 어떻게 해 한국 경제사절단에 서독 정부와 비공식 협상채널을 연결해줄 수 있었을까. 거기엔 전후 독일 경제부흥을 주도한 ‘오르도(Ordo·질서)학파’의 인맥(人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포크트 교수는 서독 경제정책을 주도한 에르하르트 경제성 장관과 같은 뉘른베르크대 출신의 오르도학파였다. 주로 뉘른베르크대 출신들로 구성된 오르도학파는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Social Market Economic System)’론을 주장했다. 사회적 시장경제란 민간 기업에게 가능한 최대의 자유주의적 시장경쟁을 보장하지만, 사회적 형평과 시장질서 확립을 위해 필요한 만큼 정부의 시장개입을 허락하는 체제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접맥한 것으로, 고전적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모두와 차별성이 있다는 게 백영훈의 설명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에 의하면 정부개입은 무조건 불필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사회적 시장경제는 건전하고 효율적인 시장기능을 위해 정부개입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시장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한 점과 공정한 경쟁이 정부법령에 의해 보장돼야 한다는 점에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간다는 현실적인 정책론이라는 점에서, 이상적으로 역사적인 법칙성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와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백영훈, 2001, 139쪽)

     

    특히 오르도학파의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에르하르트가 서독 경제성 장관이 되면서 구체화됐다. 에르하르트가 이끄는 경제성에 오르도학파의 창시자 중 한명인 알프레드 뮐러-아르막(Alfred Muller-Armack·1901-1978)이 가세하면서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더욱 강화됐다. 독일 경제발전을 이끈 국가발전의 핵심 전략이 됐고, ‘라인강의 기적’으로 이어지며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백영훈과 포크트 교수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56년. 그가 뉘른베르크대 경제학과 대학원으로 옮기면서 시작됐다. 뉘른베르크대 경제학과는 오르도학파의 본류로,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와 에르하르트 등이 배출된 곳이다. 백영훈은 고(故) 신태환 전 서울대 교수의 소개로 이곳에서 포크트 교수를 처음 만났다.

     

    백영훈은 1956년 서울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58년 8월 뉘른베르크대 에를랑겐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은 「후진국의 공업화 발전이론」. 그는 이 논문에서 후진국의 발전 전략으로 수출주도 경제성장 전략을 제시했다.

     

    백영훈은 포크트 교수가 마련한 파티에서 한 당부(當付)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독타 백(Doctor Park)”, 포크트 교수는 이렇게 다정스럽게 부른 뒤 당부했다.

     

    “너는 죽어서도 이제 박사다. 우리가 학위를 주는 것은 조국을 위해 일하라는 의미이다. 쓸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정부나 기업에서 일하지 말고 꼭 학자가 되어라. 나와 이 약속을 지킬 수 있겠느냐?”

     

    “교수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약속합니다. 정부나 기업에 들어가서 일하지 않고 학자로서 국가에 기여하겠습니다.”

     

    백영훈은 포크트 교수의 당부를 잊을 수 없었다. 이후 ‘경제발전 5개년 계획’ 수립과 서독과의 차관교섭 등에 기여함으로써 포크트 교수와의 약속을 지켰다고 필자에게 회고했다.

     

     

    <참고 자료>

    <안두순-독일 사회적시장경제의 형성과 변천>(2013.4.18, 대한민국국가모델연구모임 주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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