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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화쟁 루트(和諍 Route)

  • <비선권력 제9화> 최태민 행사에 달려가는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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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수: 133, 2017.09.10 21: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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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977년 3월 서울 용두동 경로병원 개원식에서 최태민과 박근혜가 관계자들과 함께 테이프를 끊고 있다. 국가기록원

     

    1975년 4월30일 새벽 베트남민족해방전선군(NLF)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3개 방면에서 진공해 들어갔다. 오전 10시30분 남베트남 대통령 즈옹 반 민(Duong Van Minh)이 항복했다. 폴 포트(Pol Pot)가 이끄는 크메르루즈(Khmer Rouge)는 앞서 4월17일 캄보디아 정권을 장악하고 수많은 시민을 학살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즈음 미국에서는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스티브 위즈니악(Steve Wozniak)과 함께 가족 차고에서 첫 애플 컴퓨터를 만들었다. 11월15-17일 프랑스 파리 근교 랑피에성에서 첫 주요선진국 정상회담이 열렸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6개국 정상들과 경제장관 및 외무장관들이 참석했다. 1976년에는 캐나다가 추가로 참여하면서 G7이 됐다.

     

    국내에서도 4월8일 박정희 정권이 고려대에 대한 휴교와 교내 집회 및 시위를 일체 금지한 긴급조치 7호를, 5월13일에는 유언비어 전파나 집회 및 시위를 금지한 긴급조치 9호를 잇따라 발령했다. ‘긴급조치(緊急措置)’는 1972년 개정된 유신헌법 제53조 규정에 따라 만들어진 대통령의 독재적 특별조치. 4월9일 새벽에는 긴급조치 1-4호, 국가보안법,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등으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관련자 이수병, 여정남, 도예종 등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 관계자 8명의 사형이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한지 19시간 만에 전격 집행됐다.

     

    국내외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갔던 1975년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에 열심이었다.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박근혜는 주로 4가지 분야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박근혜는 한국을 찾은 각국 외교 사절이나 인사들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또는 혼자 맞는 모습이 자주 포착됐다. 예를 들면 박근혜는 7월4일 서울 김포공항에서 가봉공화국 대통령 내외를 박정희와 함께 영접했고, 9월16일 청와대에서 국제라이언즈협회장 부인을 예방 환담한 데 이어 오후에는 브라질 교포와 환담했다.

     

    둘째, 외교 행사는 아니지만 각종 정부 공식 행사나 대통령 내외의 참석이 요구되는 행사에 박정희와 함께 참석하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박근혜는 10월 박정희와 함께 육해공군과 예비군 합동방어훈련을 참관했고, 10월20일 대한적십자사가 고 육영수에게 수여하는 적십자무궁화 대장을 적십자사 총재로부터 전달받았다.

     

    셋째, 각종 국내외 대회에서 선전하는 선수, 장애인, 사회적 약자 등을 격려하는 모습도 언론에 자주 노출됐다. 박근혜는 8월27일 제24회 국제척수장애인체육대회에 참가한 선수단을 맞아 다과회를 베풀었고, 9월11일 충북 청주시에 있는 성심양로원을 방문해 노인들을 위로했다.

     

    넷째, 박근혜는 종교 관련 행사에도 적지 않게 참여했다. 6월22일 오후 3시 대전고 강당에서 4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대전기독교연합회 주최의 ‘나라의 영원한 보호와 발전을 기원하는 기도회’에 참석한 게 대표적이다.

     

    박근혜는 특히 종교와 관련한 행사 가운데 최태민이 주도하는 행사에 얼굴을 빈번히 드러냈다. 5월4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동교동 중앙교회. 박근혜는 이날 신도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대한구국선교단 주최의 구국기도회에 참석했다. 이는 언론에 처음 포착된 박근혜의 최태민 관련 행사 참석 장면이다.

     

    “대한구국선교단이 주최한 구국기도회가 4일 하오 2시 서울 마포구 동교동 142의11 중앙교회에서 열렸다. 이 기도회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 근혜양을 비롯, 각 교파를 초월한 신도 100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기도회에서 박장원 목사는 ‘인지(印支·인도차이나) 사태를 거울삼아 총력안보에 힘을 기울이고 남북통일을 위한 마음가짐을 굳게 다지자’고 설교했다.”(『경향신문』, 1975. 5. 5, 7면)

     

    박근혜는 5월11일 오후 5시 경기도 파주 ‘자유의 다리’ 앞 임진각 광장에서 열린 구국선교단의 대규모 구국기도대회에도 참석했다. 박근혜는 이날 최태민의 즉석 제안으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로 추대됐다. 박근혜는 구국선교단 명예총재로 추대된 뒤 상기된 표정으로 “기독교도 여러분의 단결된 힘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도록 힘써달라”고 격려했다(『경향신문』, 1975. 5. 12, 7면; 『동아일보』, 1975. 5. 12, 7면 참고).

     

    박근혜는 이후 5월24일 한 군부대에서 가진 구국선교단 소속 목사와 신도 100여명의 군사훈련 퇴소식과 6월1일 오후 대구시 동산동 제2교회에서 열린 구국선교단 주최의 ‘구국연합기도대회’에 잇따라 참석했다. 박근혜는 6월21일 오후 4시 서울 배재고에서 구국선교단 산하의 구국십자군 창군식에도 참석했다. ‘대통령의 영애’ 박근혜의 참석은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언론에 보도된 코미디 같은 창군식의 모습이다.

     

    “이날 창군식에는 박근혜도 참석했다. 시민들에겐 창군식 자체보다 경호원들의 삼엄한 경비 모습이 더 볼거리였다. 1부 예배에 이어 창군식 사회는 예장종합 총회장 조현종 목사가 맡았다. 최태민에게 목사 안수를 줬던 장본인이었다. 헌병장교 출신인 조 목사의 직함은 총참모장이었다. 박근혜 명예총재와 최태민 총재는 ‘참석자 일동’으로부터 임석상관으로서 경례를 받았다. 최태민 총재는 총사령관인 박장원 목사에게 십자군기를 수여하고 박근혜 명예총재가 격려사를 했다. 식후 둘은 나란히 사열까지 하게 된다. 창군식답게 찬송가가 아닌 군가를 부르고 만세삼창으로 끝을 맺었다.”(윤석진, 1993. 11, 200쪽)

     

    박근혜는 9월2일 서울 장충동 영빈관에서 열렸던 구국선교단과 서울시의사회 자매결연식에 참석하고 격려사를 낭독했고, 12월10일 서울 북아현동 구 서울신학대학 건물에 설립된 무료 야간진료센터 개원식에 참석해 격려하기도 했다(『경향신문』, 1975. 9. 3, 7면; 『경향신문』, 1975. 12. 11, 7면 참고).

     

    8월14일 서울 덕수궁 서관에서는 김종필 국무총리와 육인수 의원 등이 참여한 가운데 육영수 1주기 추모사진전이 열렸다. 사진전은 8월24일까지 열린 이후 대구 달성공원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순회하며 열렸다. 행사 기간 서울 덕수궁에만 100만명 가까이 몰리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전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육영수 1주기 추모 행사가 열렸다.

     

    박근혜는 각종 간담회나 인터뷰 등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과 인생관 등을 드러냈다. 박근혜는 6월19일 서울 동국대 교수실에서 열린 동국대 여학생회 주최의 ‘국가 발전과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의 초청간담회에서 최근 학원 소요에 대해 “학생들과 정부 간의 근본적인 의견 차이는 없다고 생각하며 결국 국가발전을 위한 이상은 모두 같지만 학생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좁히지 못한 까닭에 때때로 오류를 범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경향신문』, 1975. 6. 20, 7면 참고).

     

    박근혜는 10월 청와대에서 『뉴욕타임스』의 리처드 핼로란(Richard Halloran) 도쿄지국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는 ‘한국의 젊은 퍼스트레이디, 자신의 길을 개척’이라는 제하로 『뉴욕타임스』 10월15일자에 게재됐다. 박근혜는 인터뷰에서 결혼은 지금 너무 바빠 생각할 겨를이 없지만 나중에 생각하겠다는 식으로, 정치 참여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각각 대답한다.

     

    “생전에 어머님은 나의 결혼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를 승낙했고 어머님이 나를 위해 고르실 분은 매력적인 사람일 것이라고 굳게 믿었었지요. 그러나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너무나 많은 일이 내게 닥쳐서 지금 결혼을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지금은 연기하고 있지만 장차 이 문제를 생각해 봐야겠지요…물론 아버님은 자신의 관심사를 이야기하시고 나도 당연히 거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지요. 그러나 나는 듣기만 할뿐 정치는 내 관심사가 아닙니다.”(김태원, 1975. 10. 16, 7면; Halloran, 1975. 10. 15, p. 57)

     

    인터뷰 내용을 종합적으로 보면 박근혜는 결혼에 대해선 ‘연기’ ‘장차’ 등의 표현처럼 당시에는 상당히 긍정적이었고, 정치 참여는 관심사가 아니라며 상당한 거리감을 가졌던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박근혜의 이같은 결혼 및 정치관은 1980년대 초반 180도 바뀌게 된다.

     

    김기춘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은 그해 11월22일 ‘재일교포유학생 간첩사건’을 발표하며 공포 분위기 조성에 앞장섰다. 그는 “북괴의 지령을 받은 간첩들이 모국 유학생을 가장해 국내 대학에 침투, 이른바 통일혁명당 지도부를 학원 안에 구성했다”고 밝혔다. 서울대와 고려대, 부산대 등에 재학 중이던 16명의 학생이 간첩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2010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작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2011년 피해자들은 재심을 청구한 끝에 2014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단행본 [비선권력] 서평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13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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